• 최종편집 2019-10-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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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키오의 한일역사 이야기 - 나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작년 겨울부터 이어지는 ‘한일관계 악화’. 한국에 산 지 22년째가 되는데, 어느 때보다 가장 ‘악화’됐음을 느낍니다. 이런 사태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한일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과 함께 성명문을 만들어 확산시키는 일을 생각해 냈습니다. 내용은 한일 양 정부, 지자체, 시민사회를 향해 우선 한국에 사는 우리 일본인, 특히 아이들에 대하여 국가 간 관계를 떠나 위협이 가해지는 일이 없도록 지켜주었으면 한다는 호소입니다. 물론 우리뿐만 아니라, 조선학교 교육 무상화 제외나 헤이트 스피치 등 일본 사회가 아직도 차별하는 한반도에 민족적 뿌리를 가지는 재일조선인의 안전을 요구하는 메시지도 적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의 배경인, 일본이 과거에 잘못한 길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현 일본 정권이 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마주 대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왜곡을 반복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의사를 밝혔으며, 일본 정부에 이웃 나라와 우호 관계를 쌓아갈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성명문을 작성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수단이 없으므로 각자가 개인적으로 SNS 등을 통해서 확산시켰습니다. 그 결과 한 달도 안돼 일본과 한국 등에서 약 250명, 5단체로부터 동참을 받았습니다. 몇몇 한국 미디어는 보도해주어서, 목소리를 낸 보람을 느꼈습니다. 더욱 큰 효력을 기대해, 일본대사관 등 공적 기관으로 보내는 것도 고려하였지만, 개인을 특정해서 가족에까지 공격을 가하는 일본의 상황이 두려워 그만두었습니다. 성명을 확산하는 과정에서 많은 동참, 같은 마음으로 싸우겠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동참은 하되 정권을 비판하는 일, 역사문제를 언급하는 일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의견, 또한 정권을 비판하거나 역사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문화나 보다 즐거운 일로 한일 간이 가까워지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사회적인 존재인 한, 정치나 역사와 관계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만들어 보다 좋은 사회를 지향하면 정치적인 의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와서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존재이며, 역사의 흐름을 의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문화교류, 청소년교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일 시민들이 꾸준히 진행해 온 ‘문화교류’조차 정권에 의해 쉽게 무너진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문화교류’를 진행하면서, 정당하지 못한 거대한 힘에 대항하며 비판의 의사를 보이며 보다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문화교류’도 못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평상시에 역사나 정치에 흥미, 관심이 없는 이에게도 성명문이 전해지며, 연대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해서, 한 단어 한 단어에 신경을 쓰며 성명문을 작성했습니다. 그 결과, 수는 적지만, 정권에 대한 비판이 매우 약하다는, 재일조선인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일본 사회에 사는(살았던) 재일조선인에 있어서는 매우 기댈 수 없는 어딘가 부족한 문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 그 자체가 일본 사회가 그들에게 가하는 차별의 심각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여러 반응이 있었는데, 한편으로 주한 일본인 커뮤니티 대부분한테는 아무 의견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찬성인지, 반대인지, 어디가 안 좋은지 전혀 모르면 대화를 나눌 수 없으며, 무시 배제된 느낌만 남았습니다. 제 경험으로 봐도 일본 학교 교육에서는 정치적인 것에 관여하는 일, 역사 특히 부(負)의 역사-가해의 역사와 마주 보는 것을 그다지 권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되었다면, 성숙한 세계 시민이 만들어가는 앞으로의 세계에 있어서 해외 거주 일본인의 역할은 한정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정치적인 것, 역사적인 것은 지금을 사는 나의 문제라 생각하며, 발신하는 것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시작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 Local-East
    • 구리
    2019-09-10
  • 한국의 이주민 사회 ‘한국에 있는 다양한 외국인주민들’
        1. 결혼이민자(2) 한국인이 외국인과 재혼한 결혼이민자 F-6-1자녀가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이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본 기관에서 가족항공권을 지원하여 공황상태에 있는 이주여성을 친정집으로 잠시 보내어 심신을 달래보기로 하였으나 친정에 가서 오래있지 못하고 곧바로 되돌아오고 말았다.그렇게 어린 아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부모들은 뼈를 깎는 아픔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고 첫째와 너무나 꼭 닮은 아들을 출산하면서 새로운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그 이후 B씨는 K국의 장모님을 초청하여 아이양육과 함께 아내의 심리정서지원을 도우려고 하였으나 반대로 장모님으로 인해 이 가정에 새로운 고민과 가족갈등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이유는 초청받아 입국한 장모님은 불법취업을 해서라도 돈벌이에 나서기를 희망하고 나아가 돈을 벌면 전액 고향으로 송금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그러나 B씨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성한 두 아들과 현재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과 장모님 그리고 배우자와 연로하신 홀어머니와 함께 작은 빌라에 일곱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공간이었다. B씨의 한 달 월급이 180여 만원에 불과한데 장모는 눈치 없이 연일 고기반찬만 요구하고 홀어머니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소와 정리는 전혀 할 줄 모르고 지내다보니 사돈지간에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고 하소연 하였다.그래서 B씨는 장모님이 고향으로 출국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만 아내와 장모는 이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불법취업을 통하여 돈벌이에만 급급하다보니 재혼 다문화가정의 또 다른 문제이다.이 밖에 특이한 사례로 한국의 중년 여성들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등 여러 국가에서 온 연하의 남성들과 재혼하여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도 상당히 많다. 이들의 만남은 대개 직장에서 일하는 가운데 외국인 남성들의 체류자격 변경으로 만난 커플이 많으며 아울러 한국인 여성을 외국인 남성들의 경제력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특히 결혼이민자들 중 외국인 남성 배우자의 경우 이민다문화 가족정책에서 완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는 여성가족부가 결혼이주여성 다문화가족 중심으로만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다양한 다문화가족 구성원이 이루지면서 정부의 이민정책과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적인 지원서비스 전달체계도 많은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고 본다.한편 재혼으로 이루어지는 국제결혼가정의 부부연령차이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도 많지만 이를 법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3)한국인이 외국인과 재 재혼한 결혼이민자F-6-1한국인 남성이 초혼에 실패하고 외국인여성을 재혼으로 만나 혼인을 하였으나 역시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하여 이혼을 하고 다시 외국인과 재 재혼한 가정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다.재 재혼한 가정으로는 한국인이 한국인과의 초혼에서 사별이나 이혼한 후 재혼으로 국제결혼을 한 후 다시 이혼하고 재 재혼으로 또 다시 국제결혼을 한 재 재혼가정들이다.하지만 초혼이나 재혼 및 재 재혼관계에서 자녀들이 각각 출생하였다면 참으로 복잡한 가족구성원이 되고 만다. 여기서 재혼을 하던 재 재혼을 하던 사람 사는 세상에 다양한 가족구성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심적 고통과 성장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게되는 수많은 마음에 상처들을 어떻게 싸매고 치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국내외 청소년문제는 대부분 부모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겨난 일이라고 청소년상담전문가들이 말한다. 복잡한 가족구성원 속에서 태어난 아동청소년들은 그야말로 특별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진다. 결혼이주여성과 고충상담을 하다가 우연히 혼인관계증명서를 보게 되었는데 한국인 남성 Y씨는 한국인 여성과 초혼으로 혼인하고 이혼하고 이어서 중국 한족 여성을 만나 재혼을 한 후 이혼하고 또 이어서 베트남 여성을 만나 재 재혼을 하고 살다가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 고충상담을 의뢰하면서 이와 같은 재 재혼가정을 발견하게 되었다.여기에서 눈여겨 볼 사안은 초혼에서 출산한 자녀들은 대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정도의 나이가 되어있는 상황에서 재혼을 하여 자녀를 출산하고 난 뒤 곧이어 이혼하고 곧바로 재 재혼을 통하여 그 사이에 자녀를 또 출산하는 가정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인 남편의 귀책 사유로 인하여 이혼을 하는 사례가 많아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대부분 이혼한 결혼이주여성들이 양육 및 친권을 지정받아 양육보호하게 되면서 한 부모가정이나 새로운 다문화가정 구성원 속으로 다시 흡수되기도 한다.이러한 복잡 다양한 다문화가족 가계도속에서 태어난 아동청소년들을 우리사회는 가장 먼저 보듬고 신경써야할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민정책을 다루는 정부나 다문화가족지원을 전담하고 있는 여성가족부에서는 이들을 언급하거나 자세한 통계자료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성가족부는 다문화가족지원법에 근거하여 결혼이주여성들 중심으로만 지원하는 예산이 연간 수백억원에 달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들이 이를 자세히 알게 되면 역차별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국내에는 결혼이민자가 284,000(외국인정책본부 자료 2018. 9. 30. 기준)여명 정도 되는데 이들 중에 귀화자가 126,000여명 정도이며 남성결혼이민자도 26,000여명이나 된다. 이로서 여성가족부가 다문화가족지원법에 근거하여 전국 시·구·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결혼이주여성을 지원하는 실제적 대상자는 131,000여명에 불과하며 이들 중에 이중, 삼중으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이용하는 중복이용자 포함 결혼이주여성은 약 35~40% 정도에 그치고 있다.그렇다면 여성가족부는 전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실제 이용하는 약 5만여명의 결혼이주여성을 위해 건강진흥원과 전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적절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결국 부모들의 재혼과 재 재혼으로 인한 그 피해 당사자는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이기 때문에 정부는 여성가족부 아래 지방자치단체를 통하여 결혼이주여성들만을 위한 각종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은 잘하고 있는 정책인가 점검해야 한다.<다음호에 계속, ‘한국의 이주민 사회’ 서점 판매 중>야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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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7
  • 멈추지 않는 에너지 ‘네팔 귀환 이주노동자, 시타람’(1)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 자료집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프롤로그시타람은 네팔 돌라카 출신의 귀환 이주노동자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2009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2016년 귀환할 때 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네팔에서는 도둑질이나 사업을 하기 전에는 획득하기 어려운 1억원이라는 거금을 벌 수 있었다.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여 10년 전에 한국어 초짜였던 그는 현재 누구보다도 유능한 한국어 강사이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는 숙련인력(E-7) 비자 취득에도 성공하였다. 목표지향적이되 친화적이며, 순응적이되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그였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누구보다 열렬한 친한주의자이며, 한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 현재 네팔에 설립된 ‘NEKO HAPPY DREAM’이라는 NGO의 책임자이자 한국어강사로 일하고 있다. NEKO는 NEpal과 Korea의 첫 두 음절을 결합한 사명이다. 네팔로 돌아간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인프라가 전혀 없는 네팔에서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멋진 2층집을 짓는 것이다. #목적을 위한 삶1 : 지금은 놀러갈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대부분의 성공한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시타람 역시 매우 목적지향적이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목표를 구현하는 일에 집중된다. 그들은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시타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시타람이 한국을 택한 이유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한국에 가려면 무엇보다도 한국어 실력이 필요하다. 한국어와 부의 축적, 이 두 가지 목표를 시타람은 이미 이루었다. 한국에서 7년간 일하면서 그는 ‘1억 정도’를 벌 수 있었다. 네팔에서 1억이란 ‘도둑질을 하던지 큰 사업을 해야’만 가능한 큰돈이다. 한국에서 번 돈의 일부를 투자한 네팔 부동산의 가치도 ‘1억 정도’이다. 그 돈을 벌기(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7년간 거의 쉬는 날 없이 ‘보통 12시간씩’ 일을 했다. 때로는 ‘아침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보통은 12시간 일했어요. 언젠가는 한 15시간씩 한 적도 많고. 토요일에도 일하고, 일요일에도 일하고. 겨울에는 밤 12시까지는 기본이고, 한시, 두시, 세시는 가끔씩.”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그는 결코 허투루 쓰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가르쳤으며, 매제에게는 사업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잘 관리만 하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자족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지금은 놀러갈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리고 돈도 많이 벌어야 되고. 60되면 그때 놀러 다녀야 되요.” #목적을 위한 삶2 : 저는 좀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한국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 ‘한국어 능력 시험 4급 합격’ 했을 때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한국어 사랑은 극진하다. 그는 현재 NEKO의 한국어 교원이기도 하다. 한국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그의 노력 역시 남달랐다. 한국에 입국하기 직전인 2007년 그는 한국어 공부에 입문했다.한국어 학원에서 두어 달 수강한 후 매일 두세시간씩 오로지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혔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다섯 명의 친구들 가운데 자신만, 네팔 현지에서 치러진 고용허가제 입국을 위한 한국어능력 시험에 합격하였다. 한국에 입국한 후에 그의 한국어 공부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한국인들과는 무조건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쉬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한국드라마” 만을 시청했다. 다른 이주노동자들과는 한국어로 채팅을 했다.“한국어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한국생활 하려면 한국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원래 공부를 좀 자랑스럽게, 좀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그렇게 한국에 입국한 지 3개월 만에 “한국어로 대답까지 할 수 있는 실력”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한국어 공부는 중단되지 않았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비자 전환이다.“E-7 비자를 받게 되면 한국에 계속 있을 수 있다고 들어서 열심히 했어요. 한국에 더 있기 위해서. 그 전에도 한국어공부를 했지만, E-7비자를 얻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그렇게 그는 한국어 “초급, 중급” 과정을 차례대로 이수했고, 한국어 능력 시험에 합격했고, 비자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자 전환에 성공한 이후에도 그의 노력은 계속된다. 10여년 전에 한국어에 입문한 그는 이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이다. 시타람의 목표는 이제 잘 배우는 것에서 잘 가르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공부 많이 했어요. 유투브로도 했고, 책들도 많이 보구요. 다른 선생님들 책들도 많이 보고. (그것들을 참고해서) 제일 쉬운 방법으로 저는 제식으로 가르칩니다. 시간 오래 걸려도 알아듣게.” #어려움과 장애물들 : 너무 힘들었어요.시타람은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이룬 사람만이 내보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유와 자신감으로 충만해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여유와 자신감은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3번이나 유급을 했을 정도로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한국에 가서 많은 돈을 벌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그를 바꾸어 놓은 셈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때는 공부를 못했는데 다음부터는 공부를 잘했습니다.”한국에 입국해서 그가 “너무 힘들었었다.”고 고백하는 어려움의 목록들 역시,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경험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입국 초기 그의 어려움은 한국어, 혹독한 노동 환경과 사업장 차별 그리고 기후, 이렇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사업장에서 그는, 네팔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근력이 필요한 육체노동을 담당해야만 했다. ‘너무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했지만, ‘최저 임금 혹은 그 보다 낮은 시급’을 받거나, 아예 ‘돈을 못 받고’ 퇴사를 해야만 했던 적도 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승진에서 배제된 적도 있다. 자신이 기능을 가르쳐준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 한국인 직원이 먼저 승진을 하는 경험은 그에게도 ‘안 좋고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 반장님은 사실은 제가 가르친 분이에요. 반장님인데 한국분이잖아요. 나는 외국인인데. 저보다 그 회사에 한 3년 뒤에 오신 분이고, 반장이 되고. 외국인한테는 안 시켜줘요. 그거는 실제로는 조금 기분 나쁘기는 해요.”(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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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
    2019-09-07
  • 한국의 이주민 사회 ‘한국에 있는 다양한 외국인주민들’
     1. 결혼이민자 (2) 한국인이 외국인과 재혼한 결혼이민자 F-6-1한국인이 이혼이나 사별을 한 후 자녀를 동반하거나 동반하지 않고 외국인 배우자를 만나 재혼한 가정을 말한다.어린자녀를 동반하고 재혼을 했다면 어린자녀는 외국인 계모나 계부를 만나 성장하게 된다. 어린자녀는 계모나 계부를 친모나 친부로 알고 성장하는 자녀들도 있지만 청소년기나 성년이 되면서 자신의 부모가 계모나 계부라고 스스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외국인 계모가 어린자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간 일을 나간다든지, 아니면 아침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잔업근무를 하면서 돈벌이에만 집중한 나머지 어린자녀를 양육하는 일에는 소홀이 한다든지 하여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나 홀로 먹거나 놀거나 공부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나이에 비하여 성인아이로 성장하면서 또래들에 비하여 자존감이 낮고 산만한 아이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재혼한 부부 사이에서 자녀가 출생되면 이복형제나 자매가 된다.이런경우 결혼이주여성은 전처의 자녀와 친자의 자녀와의 차별없는 자녀양육은 당연하건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는 것 같았다. 일부 계모들은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본국 친정 엄마에게로 보내어 양육하다가 학령기가 다되면 귀국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시키지 않거나 초등학교 입학년도 월 직전에 귀국시켜 언어는 물론 주변 친구들 사귀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재혼가정이 있기도 하다.특히 한국인 남성 중 일부는 초혼에서 결혼하여 출생된 자녀들을 결혼까지 시켜 손자 손녀들을 두고 있는 가운데 중년이 되어 재혼한 남성도 있었다. 이들 중년남성 재혼가정 중 부부 연령 차이가 최고 43년이나 되는 재혼 다문화가정도 있었다. K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은 26세인데 한국인 남편은 69세였다.K국의 결혼이주여성이 결혼 6개월이 지나면서 고충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하루 속히 남편의 곁을 벗어나고 싶다고 하면서 빨리 이혼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하였다. 이유는 놀랍게도 남편의 성욕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편은 거의 매일 밤은 기본이고 대낮에도 수시로 변태적 성행위를 요구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고통을 털어놓았다. 이 K국의 이주여성은 남편이 성관계에 제대로 응하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억지로 시도하기에 더 이상은 고통스러워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출하여 본 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왔다. 본 기관에서는 남편을 만나 이와 관련하여 상담을 진행하였으나 남편은 여성으로서 오히려 더 좋은 것이 아니냐는 식이었다. 이들 부부는 수차례에 걸쳐 가출과 상담을 반복하는 가운데 K국 이주여성이 급기야 가출, 잠적하면서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그 이후 K국 이주여성의 남편(69세)은 아내의 가출로 인하여 혼자 살게 되자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본 기관에 찾아와 중국조선족이나 기타 국가의 여성들 중에 결혼에 실패한 여성들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부탁하며 혼자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추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결혼이주여성들 중에는 부부연령차이가 평균 10~20년 차이가 나는 케이스가 있는 반면 비슷한 연령대 부부도 있으나 문제는 결혼초기에 언어와 문화적 소통의 문제로 혼자 집안에서만 있어야 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이 많아 가족들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결혼이주여성은 머나먼 타국으로 시집와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문화와 언어로 생활환경에 적응하기까지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결혼이주여성은 입국초기 몇 개월 동안 시간을 혼자서 하루 종일 보내다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유없이 화를 낸다거나 분노조절을 못하여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초기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하지만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본 기관에서 상담을 통해 만난 한국인 남편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응대하고 있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결혼이주여성이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생활에 적응을 하려고 고된 과정을 보내는 것은 까맣게 잊고 집안청소를 잘 안한다거나 밤에 성관계를 잘 응해주지 않는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낮잠만 잔다든가 하는 문제로 불만만 토로하고 있는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본 기관의 상담과정에서 한국인 남편에게 아내의 현재 상태를 말해주면서 조금의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언을 해보았지만 결혼이주여성의 성관계 불응에는 이해고 뭐고 용납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재혼한 가정 중에 B씨는 사십대 초반에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둘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K국의 여성과 재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갔다.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쁘고 귀여운 아들이 4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유는 할머니가 빌라 옥상에 잠시 올라가서 일을 하고 있는 사이 손자 녀석이 할머니 몰래 옥상에 올라와 놀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손자가 노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평소와 같이 옥상 출입문을 잠그고 내려가고 말았다.이에 어린 손자는 뒤늦게 옥상출입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굳게 잠겨버린 문을 열수 없게 되자 혼자서 옥상에서 내려오기 위하여 울며 온갖 발버둥을 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가족들은 이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해가 저물어 어둠이 짙어가는데에도 아이가 보이질 않자 그때서야 온 식구들이 나서서 아이를 찾아 동네어귀를 돌아다녔지만 아이는 끝내 보이질 않았다.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온 식구가 몇 시간 동안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걱정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빌라 앞에 동네주민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하며 달려가 보니 그렇게 애타게 찾던 바로 그 아들이었다. 그 아이는 혼자서 옥상에서 몇 시간을 울며 옥상 탈출을 시도하다가 결국 4층 빌라 아래로 추락하여 참혹하게 즉사하고 말았다.가족모두가 망연자실하는 것은 물론 결혼이주여성과 재혼남편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 슬픔과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악몽의 시간으로 이들 가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한국의 이주민 사회’ 서점 판매 중>야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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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9
  • 한국의 이주민 사회 ‘한국에 있는 다양한 외국인주민들’
      1. 결혼이민자 (1)한국인과 외국인 초혼 결혼이민자 F-6-1 한편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하여 결혼한 V국의 일부 결혼 이민자들 가운데는 입국하자마자 취업을 원하고 있으며 아울러 급여를 받으면 전액 친정집으로 송금해버리는 사례로 인하여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혼이민자의 한국인배우자 남성으로서는 아내의 그러한 행동에 납득이 안 되고 아울러 나날이 부부 간에 불신만 쌓여가다가 결국 이혼을 하게 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한국 속담에 아내가 귀엽고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고 한다. 국제결혼가정 중 극히 일부분의 철없는 한국 남성은 결혼초기에 아내가 예쁘고 사랑스러워 처갓집으로 용돈을 매월 50~100만원까지 송금을 해준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되어가면서 경제적 능력의 한계로 송금액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여 매월 10~20만원만 송금하게 되었다. 그런데 철없는 일부 결혼이주여성은 매월 남편이 처갓집으로 송금해주는 금액이 결혼이주여성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의 척도로 이해하면서 남편보고 ‘오빠 사랑이 식었어?’ 하면서 그때부터 부부간에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하여 결국 매월 결혼 초기에 송금해준 금액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두 사람은 결국 이혼 길에 서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결혼이란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상호 신뢰와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되는데 일부 결혼이민자들 중에는 오직 돈이 목적이 되어 결혼생활을 그르치는 경우가 너무 많아 안타깝다. 그렇기 때문에 다문화가족정책과 행정에 있어서 국제결혼 첫 단추부터 지원해야할 대상자를 분명하게 선별하여 그에 맞는 눈높이 교육과 정책 및 행정을 펼쳐야 한다. 기억에 남는 결혼이민자 초혼 다문화가정의 상담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동남아시아 V국가의 결혼이주여성인데 결혼 후 첫아기를 출산하고 3일 만에 아기와 함께 시집으로부터 쫓겨나 이주여성 긴급센터에 보호를 받는 사례가 있었다. 이주여성 긴급센터 관계자에 의하면, 아기와 함께 보호하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을 출산한 자녀와 함께 자국으로 동반 출국을 시켜야 되는데 출산한 아기의 여권을 만들지 못하여 출국을 못시키고 있다며 아기여권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상담이었다. 이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V국의 결혼이주여성은 결혼 1년 전 자국에서 한국인 배우자와 며칠만난 후 결혼약속을 하고 한국인 배우자로부터 결혼초청 비자서류를 받아 입국하기까지 약 3개월 정도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중에 자국의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한 것이 임신이 된 사실도 모르고 결혼초청비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지냈다. 그러다가 뒤늦게 한국으로부터 결혼이민자 초청서류를 받고 입국하여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아기를 출산했는데 아이의 외모를 보고 시집식구들이 이상하게 여기면서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결과 친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어 산부인과에서 산후조리 중 시집으로부터 쫓겨난 케이스였다. 아기는 엄마의 나라 V국적의 여권을 만들어야 되는데 V국 한국주재대사관에서는 아기아빠를 동반하고 방문해야 만이 아기 여권발급이 가능하다고 하나 실상 아기아빠는 V국에 있으며 누군지 정확히 알 수도 없으며 알아도 한국에 쉽게 입국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주여성 긴급센터 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관할 출입국사무소를 방문하여 V국의 결혼이주여성의 이러한 사연을 소개하고 아이를 동반하여 하루 속히 자국으로 출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기관에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는 수없이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기관에서는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법무부와 외교부에 동시다발로 민원을 제기하였지만 아기여권발급은 전적으로 V국 대사관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국내 공공기관에서는 아기여권발급에 관한 협조요청 공문발송 외에는 별다른 방안이 없다는 답변만을 받았다. 또한 공공기관에서는 V국 주재대사관에 공식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지만 만약 하게 되면 내정간섭으로 오해받기 쉬워서 V국의 결혼이주여성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변만 거듭 되돌아 왔다. 그런데 외교부 관계자 한분이 국민신문고의 민원을 읽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주셨다. 이 케이스는 V국의 한국주재대사관의 고유 업무라 공식적인 라인을 통하여 요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비공식라인을 통하여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귀띔을 해 주었다. 그래서 비공식 라인을 통하여 V국의 한국주재대사를 잘 아는 인맥을 찾게 되었고, 이러한 사연을 전달하면서 협조를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던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어 곧바로 관련 서류를 준비하여 아기여권을 발급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기가 첫 돌이 될 무렵 엄마와 함께 출국을 하게 된 사례가 있었다.이렇게 쉽지 않던 문제를 해결하고 보니 전국에 이와 같은 유사한 사안으로 인하여 출국을 못시키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기관으로 문의가 쇄도해 오기도 하였다. 또한 사례로 결혼중개업체를 통하여 부모님들의 성화와 도움으로 비슷한 연령대에 있는 V국의 이주여성과 결혼한 다문화가정이 있었는데 이들 부부의 사이가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런데 이들 부모님들이 본 기관에 방문하여 상담을 요청하면서 사이가 좋은 아들 부부를 이혼시켜야 한다고 난리였다. 이유인즉 아들 부부는 부모와 함께 단독주택 아래위층으로 나뉘어져서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부모님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녀들 집에 들락거리며 온갖 간섭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아버지가 아들 부부의 집을 방문했는데 며느리가 그 시간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시아버지가 잠자는 며느리의 방에 들어가 이불을 확 걷어붙이는 일이 있었다. 이에 며느리는 너무나 심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고 이후부터는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시어머니와도 날이 갈수록 관계가 악화된 케이스였다. 그러나 이에 상관없이 아들 부부의 금슬은 날이 갈수록 더욱 좋아지고 있는 반면 시부모님들과의 관계는 계속하여 나빠지고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한국의 이주민 사회’ 서점 판매 중>야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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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천
    2019-08-06
  •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사하닷’(1)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프롤로그…사하닷은 방글라데시 브라만바리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사진 아래 오른쪽)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인 그는 대학원 졸업 후 금융회사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 2008년 한국에 입국했다. 입국 초기 여느 이주노동자와 다름없이 그 역시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이라는 혹독한 적응기를 경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달랐다. 한 번도 어렵다는 두 번의 비자변경에 성공해 취업과 가족동반이 자유로운 ‘거주’ 이주민 자격(F-2)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노동자였던 사하닷은 이제 사업가요, 사회활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단순한 적응을 넘어 좀 더 큰 자유를 갈망했던 이유는 한국을 단순한 이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국은 앞으로 가족과 함께 살아갈 ‘친절하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그는 친절하고 아름답지만 고향의 문화와는 70퍼센트 이상이 다른 이 나라에서, 방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이 조금이나마 어려움을 덜 겪으며 꿈을 이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업만큼이나 그들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선다. 동료들에게 그는 믿음직한 한국 생활의 길잡이요, 안내자이다. 특히 그는 열렬한 사회통합 프로그램 전파자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다. 살기 편하지만 오기 힘든 나라 :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어요.사하닷은 2008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그는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방글라데시의 엘리트이다. 졸업 후 1년여 금융회사에 근무했던 그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간명하다. 방글라데시의 상황이 젊은 엘리트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한국의 70~80년대 정치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일자리도 없고, 취업을 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지요.” 한국에서 지낸 지난 10여년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0년 잠깐 귀국하여 취업 준비 기간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필해주었던 아내와 결혼하였다. 2014년 말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꿈꾸는 비자 변경, 그것도 두 번이나 연속으로 성공하였다. 그 결과 그의 위상은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E-9)에서 ‘전문인력’(E-7)으로, 전문 인력에서 취업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부여받는 ‘거주민’의 지위(F-2)로 격상되었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직업을 바꿀 수 있다. 고용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가족을 초청해서 함께 살 수도 있다. 그는 그러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하던 사업을 잠시 접고 현재는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조만간 가족들과 재결합할 것이고, 그 때에는 다시 사업에 전념할 계획이다. 그에게 한국은 이제 이처럼 ‘살기 편한 곳’이고 ‘사람들도 다 친절’한 곳이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현재의 자유와 편안함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을 이미 끝낸 사하닷이기에 누릴 수 있는 보상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그렇지만 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방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한다. 그들의 한국 생활 도우미요,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싶어한다.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방글라데시 사람이 많은데, 과거보다 더 어려워졌어요. 제가 올 때보다 10배 가량이나 어려워졌어요. 돈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해도 한국에 입국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어렵게 한국을 선택한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희망의 공간 한국 그러나 : 한국일은 어렵고 힘들어요다른 나라로 이주를 선택한 방글라데시 사람들 조차 희망할 정도로 한국은 인기있는 이주의 목적국이다. 그러나 ‘희망의 공간’은 어려움과 난관을 이겨낸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한국 적응은 끝났다.”라고 사하닷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지난 10여년의 한국 생활 동안 그만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경험하고 그를 극복 혹은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로서 사하닷은 가스밸브 제조회사, 고무공장, 스폰지 제조공장, 농기구제조업체 등에서 일한 바 있다. 그 곳에서 그가 경험한 ‘어렵고 힘든’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 째 사업장의 고용주는 계약과는 다르게 그에게 지사 근무를 강요했다. 혹독한 노동 조건과 노동 강도는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공통적이었다. 고무 공장의 유독가스는 견디기 어려웠다. 농기구제조업체의 페인트 작업은 특수마스크를 착용하고도 한 시간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이나 안전 장구는 사비로 구매해야만 한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혹독한 조건에서, 하루 열네시간에 가까운 고강도 노동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예외 없이 처우와 승진에서의 차별과 불이익을 경험해야만 한다. 사하닷의 경우 퇴직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업주를 노동부에 진정해서, 일부를 받아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승진에서의 차별은 그에게도 여전히 ‘넘사벽’의 장애물이다. “5년 이상 일을 잘 했는데요, 한국사람 및 다른 외국인과의 차별이 있어서 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인과 중국인의 경우는 2년만 지나도 반장이나 과장으로 승진을 시켜주었는데,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사하닷은 방글라데시 동료들에게 ‘희망의 공간’의 현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어요.” 방글라데시와 한국문화는 70% 이상 다르다고 생각해요 : 조심해!사하닷이 평가하기에, 한국 문화와 방글라데시 문화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크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가 결정적인 어려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 그것은 ‘조심’이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온 동료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그가 맨 처음 하는 말은 “조심해!”이다. 가장 많이 하는 말 역시 “조심해!”이다. 그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조심’의 목록에는 ‘노동 규율, 법질서, 추위, 음식 및 회식 문화’ 등이 포함된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노동 규율이다. 사업장 내에서의 안전이다. 주지하다시피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율은 한국인 노동자의 무려 6배에 달한다. 낯선 사업장에서의 정보 부족이 외국인 산재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사하닷은 공장에서 서두르지 말고 조심할 것을 가장 강조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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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6
  • 내가 베트남의 태권도 부흥사 ‘베트남 귀환 이주노동자, 반흥’(3)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쉬운 일은 없어요. : 변화와 도전, 마다하지 않을 뿐이죠.“회사 폐업이 결정된 후 구조조정을 할 때 직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어요. 어제도 협박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러나 그는 담담하다. 같은 민족 노동자들로부터 오해와 협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자신의 선택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제가 관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옹호하게 되니까 노동자들은 제가 한국 사람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서운하기도 했지만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는 동료들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폐업 절차를 밟고 있는 미래가 없는 회사이지만 “대표님과 청산 작업이 마무리 될 때 까지 남아있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생산직’에 종사할 때 배운 워드를 ‘사무직’ 모드로 전환하는 일 역시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8년여 삶을 경험한 그에게 ‘생활 및 생산’ 관련 한국어에는 능숙하다. 한국에서 토픽 3급도 획득하였다. 그렇지만 ‘사무직’으로서 그에게 한국어는 다시금 미지와 무지의 영역에 해당된다. 사무 관련 용어들 대부분은 ‘번역’이 필요할 정도로, 그에게도 낯선 언어들이다. 새로운 과제를 다루는 그의 방법은 한결같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 반드시 “기록한 후, 집에 가서 사전으로 찾아보고 공부” 하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계획과 꿈 :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한국사랑현재 직장이 폐업된 후 재취업에 대해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넘쳐나는 추천과 스카웃 제의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 취업도 어렵지 않아요. 법인장님이 현재 회사 폐업되면 일하라고 회사도 소개시켜주었고 근로조건도 더 좋은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거절했어요. 아내 회사 사장님이 스카웃 제의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내랑 같은 회사 다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절했어요.” 그가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다음 번 직장은 퇴직한 상사가 설립한 ‘기업용 발전기 원자재 수입 제조업체’에서 ‘총괄 매니저’로 일하는 것이다. “그 상사가 한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해서 발전기 회사에 공급하는 업체를 만들 계획인데 총괄매니저로 일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그 분이 영업 및 투자계약을 하면 제가 부품조달 등을 총괄하는 거죠. 지금 회사 마무리 되는대로 10월 중부터 시작할 계획이에요.” 귀환이주노동자로서 성공 가도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국을 떠난 지가 5년여가 이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그의 그리움,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그의 동경은 결코 작아지지 않고 있다. “집안 형편이 좀 더 좋았더라면 한국에 유학 오고 싶었어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한국에서 생활한다면, 한국어도 더 열심히 배우고 가족들도 초청해서 한국에서 같이 살고 싶어요. 가족을 초청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부럽기만 해요. 물론 제가 일하던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족 초청이 가능한) 비자를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요.” 에필로그…반흥은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다.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신의를 지킨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중요한 것은 베트남과 한국,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두 사회 모두에서 반흥의 이와 같은 캐릭터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도전적이었던 것처럼 베트남에 귀환에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성취는 그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존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의 특별한 점은, 오롯이 개인의 역량으로 이루어낸 개인적인 성취들이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려고 한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청소년들에게 태권도를 전수하여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반흥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다. 그 ‘사회’가 베트남과 한국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글로벌 리더이기도 한 사람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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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5
  • ‘결혼이주여성들의 아픔’
      며칠 전 베트남 결혼이주여성 무차별 폭행 사건과 익산시장의 막말로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어 국내에는 물론 해외에서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낯부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국내 결혼이주여성들의 또 다른 절규는 무엇이 있는지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결혼이주여성들 가운데 귀화를 한 한국인이지만 몸이 불편하신 홀로 계신 친정 부모님을 모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혼이주여성 대부분은 코리안 드림의 꿈과 희망을 안고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아들딸 낳고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안정된 생활과 정착을 하고 있다. 하지만 결혼이주여성은 한국인이 되어도 영주자격을 가지고 있어도 친정 부모나 형제는 마음대로 초청도 할 수 없고 어쩌다 초청하여도 장기체류는 어렵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결혼이주여성으로 입국한 L씨는 한국인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 배우자는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였고 그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겨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이주여성 L씨는 체류자격(F-6) 외국인 신분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조금이라도 빨리 잊고 위로받고자 친정 부모님을 초청하고자 했다. 역시 초청이 어려워 밤낮으로 고된 노동과 함께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 2년 전 귀화를 하게 되었다. L씨는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고 외국인 신분이라 귀화 전에는 친정 부모님 초청의 명분이 없어 초청하지 못하다가 귀화를 하고 한국인 신분으로 친정 부모님을 초청하였지만 역시 3개월짜리 여행 비자로 3개월에 한 번씩 비자 여행을 다녀야만 하는 상황이다. 한편 러시아에서 결혼이주여성으로 입국한 G씨는 2000년도에 한국에 와서 현재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두고 영주자격으로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나 늘 마음에 무거운 고민을 안고 있다. 그 이유는 러시아에 홀로 계신 친정 부모님(67세) 때문이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비자 여행을 다녔지만 최근에는 친정 부모님의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혼자 비자 여행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지만 관할출입국체류관리과에서는 장기체류 허가는 불허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교롭게도 G씨 친정 부모님은 형제나 친인척은 단 한 분도 없고 결혼이주여성 G씨가 무남독녀이기에 G씨가 친정 부모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모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 법과 제도는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결혼이주여성들의 절규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D씨는 필리핀에서 비즈니스 사업을 하던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현재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두고 있다 D씨는 10년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귀화신청을 두 번이나 했는데 번번이 언어능력 평가 면접시험에서 불합격을 받아 귀화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D씨는 법무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사회통합프로그램도 이수하였지만 합격으로 이수하지 못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3회 교육참석으로 이수하였기에 귀화면접시험 면제 혜택을 받지 못한 경우이다. 이로써 D씨는 한국생활 10년 동안 가정에서는 남편이 필리핀 언어와 영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기에 한국어 습득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귀화면접관들은 귀화자의 개인적인 형평과 처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국적법에 따른 지침대로 할 뿐이기에 법과 제도의 손질이 시급한 상황이다. 법무부는 국제결혼배우자 초청서류에 보면 언어소통 부분이 있는데 제3국의 언어라도 상호 소통이 되는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 그렇다면 필리핀 결혼이주여성 D씨 같은 경우에도 배우자와의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아울러 사회통합프로그램도 어찌했거나 이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귀화면접시험에서 그것도 4회에 걸쳐 불합격을 시킨다는 것은 법과 제도에 보완점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이민자 300만 명을 바라보는 시대에 이민자들의 다양한 욕구와 함께 각종 인권과 권리가 요구되고 있으나 법과 제도는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010-2756-3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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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5
  • 내가 베트남의 태권도 부흥사 ‘베트남 귀환 이주노동자, 반흥’(2)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이주노동, 어렵지 않았어요,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물론 그 역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향수병과 언어 장벽, 기후의 차이, 문화의 차이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과 좌절의 시기는 한국에 입국한 초기 ‘두 달’에 불과했다. “한국에 와서 가장 기뻤던 때도, 슬펐던 때도 첫 두 달 이었던 것 같아요.” 두 달 간의 막막함은 첫 월급을 받으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100만원의 첫 월급을 받고, 거금인 1천 달러를 고향에 송금하고도 돈이 남은 그는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된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이후 그의 한국 생활은 ‘축복’의 연속과도 같았다. 그가 송금한 돈으로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멋진 집이 지어졌다. 2009년에는 아름답고 유능한 고등학교 동창과 결혼도 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여덟 살인 큰 아들은 벌써 “태권도를 하고 있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해”, 태권도가 전부인 아빠를 기쁘게 해주고 있다. 한국 생활은 돈과, 집, 태권도, 사랑과 가족 이외에도 그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해주었다. 그는 한국어 토픽 3급을 획득했고, 자동차 정비술을 익혔으며, 컴퓨터 프로그램에 참가해 워드나 액셀 등 사무용 프로그램 사용법도 익힐 수 있었다. #축복이 실현되는 방법 : 제 한국 생활 잠깐 소개할게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이 술술 풀릴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쉬워 보이는 그의 한국 생활,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 순간 수긍이 간다. 아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축복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 그가 반흥이다. 일단 반흥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친화적이다. 첫 직장인 안산의 동파이프 공장에는 이미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다른 외국인들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두번째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성의 식품회사였는데, 그는 그 곳의 분위기를 ‘한 가족 같다’고 표현한다. “화성에 있는 식품 회사는 직원들이 거의 가족, 친족이었어요. 한 가족 같아서 제가 그래서 일하기로 했어요.” 친화적이지만 그는 치밀하고 담대하기도 하다. 한국에 온 지 불과 일주일 후,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동료가 회사에서 무려 7킬로미터가 떨어진 피씨방에 반흥을 택시로 데려다 준 적이 있다. 다음 주부터 반흥은 방글라데시 친구의 도움도, 택시 기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그 피씨방을 이용할 수 있었다. 택시가 가는 경로를 일일이 노트로 기록한 후, 그 노트를 보고 걸어서 피씨방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택시가 어느 경로로 가는지 노트로 일일이 다 적었어요. 그 다음 주부터 일요일마다 노트를 보고 약 한 시간 반을 걸어서 그 피씨방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채팅을 했어요.” 부지런함과 성실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자산이자 매력이다. 그가 태권도는 물론이요, 한국어, 컴퓨터, 자동차 정비 등 각종의 기능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친구들이 놀러’ 다니는 일과 후 저녁 시간과 주말을 온전히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 놀러 다닐 때 열심히 한국어 공부해서 토픽 3급도 취득했어요. 일 없을 때는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저녁에는 스스로 공부해야 했어요.” 성공적인 귀환 : 전 돌아와서도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있어요. 이주노동자들이 출신국으로 귀환해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고된다. 목적국에 적응하는 것만큼이나 몇 년 혹은 십여년 이상 떠나있던 출신국에 다시 적응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재결합하는 문제며, 재취업하는 문제 등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 번 이주를 경험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적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이주를 선택하게 된다고들 한다. 이 점에서도 반흥은 예외다. 그의 귀환은 성공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모범사례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출퇴근을 한다. 맞벌이를 하지만 육아 걱정도 없다. 부모님께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쪽같은 세 자녀를 키워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재취업 과정도 순조롭다. 베트남으로 돌아온 직후, 그 역시 진로를 고민해야만 했다. 사업을 해야 할까, 취업을 해야 할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업을 선택한 귀환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고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사업하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 있었지만 다른 귀환자들을 보니 쉽지 않는 것 같아 포기하고 회사부터 먼저 다니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직장은 하노이 인근 박린성에 소재한 한국계 기업, 핸드폰 충전 케이블 제작 회사였다. 회사의 규모는 그가 한국에서 일했던 곳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직원이 무려 95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도 달라졌다. 한국에서 그는 단순 노동자였다. 베트남의 회사에서 그는 직원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인사관리 담당자이다. 쉬운 일은 없어요. : 변화와 도전, 마다하지 않을 뿐이죠. 베트남의 한국 기업에서, 베트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인사 및 노무 관리’ 담당자로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반흥 이전에 이 일을 담당했던 서너명의 직원은 “고된 노동과 통역의 부담”이라는 공통의 사유로 사직을 선택했을 정도이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이 편안한 언어로, 업무를 지시하고 관리하는 일은 언뜻 보면 매우 쉬워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관리자와 베트남 직원들 사이의 상이한 입장과 견해를 중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측을 향해서는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는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중재는 결코 쉬울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정당한 일처리를 하고 있을 때조차, 일부 노동자들은 협박 문자를 보내오기도 한다. “회사 폐업이 결정된 후 구조조정을 할 때 직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어요. 어제도 협박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러나 그는 담담하다. 같은 민족 노동자들로부터 오해와 협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자신의 선택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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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5
  • 한국의 이주민 사회 ‘한국에 있는 다양한 외국인주민들’
      6. 중도입국 이주배경 아동청소년(F-1. F-3) (2)부모의 취업 및 비즈니스 사업으로 동반입국한 아동청소년 이들 중도입국 청소년들은 한국사회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종교 선택과 달리 특정 국가는 부모의 종교에 자녀들도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 종교 활동 강요에 어린 아동청소년들은 갈등하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의 거주실태조사와 함께 부모들의 가정환경실태조사도 병행하여 조기에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의 마음에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제도적 행정적 조치로 준비된 이민다문화정책으로 바로 세워지길 기대한다. 특히 청소년기본법에는 만 9~24세까지 아동청소년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동포나 고려인 동포는 물론 일반 다른 국가 역시 중도입국 아동청소년들은 만 19세 이전 미성년 나이 때에는 부모의 체류자격에 따라 같은 기간만큼만 체류자격을 부여해주고 있다.하지만 만 19세 이상이 되면 아동청소년 스스로 독립된 체류자격을 받아야 하는데 실상 부여해 줄만한 체류자격이 없었다. 그리하여 법무부는 수년 동안 갓 성인이 된 청소년들에게 부모와의 생이별로 이산가족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시민단체들과 광주 고려인마을 이천영 목사의 눈물어린 호소와 언론보도를 통하여 최근에서야 만 25세까지 체류자격(F-1)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끊는 젊은 20대 나이에 대학을 진학하지 않는 그들은 취업을 할 수 없는 체류자격이기에 무엇을 하고 지내라는 것인지 정부 관계자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시민단체들의 성화에 못 이겨 18세부터 취업을 간접적으로 허용하는 제도로 변경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취업을 하기 전 한국어 어학원(당)에서 공부를 하거나 법무부 사회통합프로그램에 참여한다든가 하는 기회도 있지만 이미 한국어 를 완전히 습득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육체적인 노동이든 정신적인 노동이든 일을 해야 하는데 체류자격에 발목이 잡혀 아무 일도 못하고 부모의 애간장만 태우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한 사례를 인용해보면 우즈베키스탄에서 입국한 고려인 부부는 18세 아들을 동반하고 H-2체류자격으로 거주하고 있다. 18세 아들은 벌써 금년에 만20세가 되어 간신히 체류자격은 연장 받았지만 그 사이에 부모님들의 방문취업(H-2)비자만기가 도래하여 온 가족이 출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최근에는 고려인 방문취업비자(H-2)로 만기 출국한 이들에게 1개월 이내로 재입국이 가능해졌지만 어려운 형편에 온 가족이 항공비를 지출하며 일단 출국을 했다가 재입국 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있거니와 재입국 하더라도 20세 아들은 특별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더욱 답답하기만 하였지만 최근의 조치로 하나의 고민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3) 부모의 산업재해로 인하여 장기요양중인 중증산재환자의 자녀코리안 드림의 부푼 꿈을 안고 한국 땅을 찾은 이주노동자들이나 중국 및 고려인동포들 가운데 열악한 산업현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산업재해를 입고 중증장애인이 된 가족의 자녀들이다.이들 자녀들은 어느 날 갑자기 부모의 사고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원치 않는 이민을 당한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이다. 또래의 친구는 물론 태어난 정든 고향을 모두 등지고 머나먼 타국으로 이민을 와야만 하는 현실에 어린 아동청소년들의 마음과 생각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언어에 장벽과 문화의 충격에 또 한 번의 힘든 과정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우리사회는 무엇을 해줄 수 있었나 묻고 싶다. 이들은 낯선 땅에 오자마자 초중고등학교 입학이나 편입학부터 높은 벽을 실감해야만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입학을 하더라도 학교생활이 만만치가 않는 것은 물론 한국어교육 때문에 다문화위탁학교로 위탁이라도 받게 되면 위탁학교기숙사 생활로 인하여 일주일 내내 부모와 또 다시 떨어져 살면서 학업을 지속해야만 하였다. 한국어교육 때문에 위탁교육은 짧게는 한 학기 6개월 길게는 최장 1년 6개월 두 학기 반을 지난 후 다시 원적학교로 되돌아오게 되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고 낯설은 선생님과 학교 환경에 적응하기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든 적응 기간을 거친다고 볼 수 있는 중도입국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이다. 대개 아버지의 중증장애로 인한 실망감과 절망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 어느 아동청소년들 보다도 높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는 자녀들이다. 우리사회가 이들 아동청소년들을 더욱 보듬어 감싸 안고 나아가야할 중도입국 아동청소년들인데 외국인 가정이라는 신분 때문에 특별한 관심밖에 놓여있는 이들이다. 특히 부모들의 불안한 체류자격(G-1) 때문에 언제 어떻게 고향으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영구적으로 한국에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장하며 공부하고 있는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이다. 다행이도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본 기관과 같은 이주민지원단체를 만나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로 각종 지원협력을 받으며 성장한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 중에 벌써 원하는 대학을 진학하고 꿈을 현실로 옮겨가고 있는 이들도 생겨났다. W국에서 온 A군과 B양은 초등학교 나이에 부모님의 산업재해로 인하여 부모님과 약 1년여 이상 떨어져 살다가 아버지의 장기 요양으로 하여금 가족이민을 하여 현재는 가족모두 한국에 살고 있다. A군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동차정비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어렵게 동포비자(F-4) 체류자격으로 변경하고 현재 청주에서 취업을 하고 있으며 B양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지난해 입학하여 재학 중에 있다. 이들 두 남매는 부모님의 사회봉사와 훌륭한 가정교육으로 인하여 모범적인 청소년기를 보내고 한국에 정착하는데 성공한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부모의 산업재해로 인하여 원치 않는 이민을 당한 대부분의 중도입국 자녀들은 한국생활에 부적응하면서 술과 담배 및 게임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며 부모님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한국의 이주민 사회’ 서점 판매 중>야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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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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