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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4 日本軍「慰安婦」メモリアル・デー
    <사진 오마이뉴스>    韓国に住んでいれば、8月15日が日本の植民支配から解放された光復節(日本では敗戦の日)だということはよくご存じだと思います。ではその前日の8月14日が何の日か、皆さんは知っていますか?    8月14日をネイバーで検索してみると、一番最初に「法的記念日、日本軍"慰安婦"被害者メモリアル・デー」とでてきます。この日は日本軍「慰安婦」問題を国内外に知らしめ、日本軍「慰安婦」被害者を称えるために制定された国家記念日です(ちなみに日本で調べてみると「専売特許の日」「裸足の記念日」としか出てきません)。    ではなぜ8月14日なのでしょうか?30年前、1991年のこの日、韓国人女性金学順さんが、韓国で、いえ世界で初めて公に、「自分が日本軍"慰安婦"被害者だった」と実名で公開証言をしました。市民団体がこの日をメモリアル・デーとして、毎年様々な行事、キャンペーンを行ってきましたが、2017年に韓国政府が、「日帝下、日本軍"慰安婦"被害者に対する保護、支援および記念事業などに関する法律」の一部改定を行い、正式に国家記念日としました。    1924年に中国東北部で生まれた金学順さんは、数えで17歳の時に北京で日本軍将校に連行され、「慰安婦」として中国各地を巡り働かされました。独立後の韓国に戻りましたが、その後もたいへん厳しい生活を送りました。1990年に日本政府が「慰安婦は民間業者が連れ歩いた」と日本軍の関与を否定したことを知り、金学順さんは怒りに打ち震え、「私がここにいる」と、ついに重い口を開いたのです。    この金学順さんの証言は、女性に貞操観念を強いる社会的風潮の中で自分達の被害を打ち明けることができず、心身の傷を抱え生きてきた女性たちに立ち上がる力を与え、韓国はもとより、アジア太平洋の国々、そしてオランダの女性たちが次々に自分も被害者だったと証言し始めました。   翌年、1992年の1月8日に日本の"公式謝罪"、"法的賠償"、"歴史教科書記録"などを求めて旧日本大使館前で開かれた水曜集会は、今年の7月14日に1500回目を迎えました。金学順さんはこの水曜集会だけでなく、様々な活動の先頭に立ち、運動を率いました。    被害者の立ち上がりを受け、日本政府は重い腰をあげ、日本軍「慰安婦」の調査に乗り出しました。歴史学者により日本軍の関与を裏付ける公文書が発見され、1993年に日本政府として責任を認めた「河野談話」が発表されました。「河野談話」は被害の内実に詳しく言及しておらず、不足の感は否めませんが、日本軍「慰安婦」問題に日本が国家として向き合うスタートラインとしては評価できます。   ところが90年代後半から侵略、植民地支配の過ちをなかったこと、正しいことだったとする歴史修正の動きが力を持つようになり、日本軍「慰安婦」被害者たちが日本で日本政府を相手に起こした裁判は次々と敗訴していきます。    日本の真の謝罪を受けられないまま、金学順さんは1997年の12月16日に亡くなりました。ともに立ち上がった被害者たちもまた一人また一人とこの世を去り、韓国政府が登録している被害者は14人です(2021年7月現在)。    そしてこの間、2015年12月28日の拙速な"合意"、2021年の1月8日の国際的な人権意識に照らし合わせた判決など、日本軍「慰安婦」問題は一進一退を繰り返していますが、被害者や支援者の粘り強い闘いは続いています。   ☆金学順さんの証言から30年の今年の8.14に合わせて、京畿多文化ニュースの協賛でコラムの読者に素敵なプレゼントをお送りします。   コラムへの感想、ご希望、そして日韓歴史をめぐる思いなど、メッセージをお送り下さい。Stand for Human Rightsを掲げ、日本軍「慰安婦」被害者の運動を支援する社会的企業、マリモンド(Marimond)の商品を抽選で8人の方にお送りします。   メッセージの送り先:m_akio74@hotmail.com 締め切り:8月31日 住所、氏名、ご連絡先を必ずご記名下さい。(メッセージは韓国語、日本語のどちらでも構いません) 当選は発送をもって代えさせていただきま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한국에 살고 있다면 8월 15일이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일본에서는 패전 날)임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날인 8월 14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십니까?   8월 14일을 네이버로 검색해보면 가장 먼저 「법적 기념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라고 나옵니다. 이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하여 제정된 국가기념일입니다.(참고로 일본어로 검색해보면 「전매특허 날」, 「맨발 기념일」만 나옵니다)   그러면 왜 8월 14일일까요? 30년 전 1991년의 이날에 한국인 여성 김학순 씨가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며 실명으로 공개증언을 하였습니다.    시민단체가 이날을 기림날로 매년 여러 행사, 캠페인을 진행해 왔다가 2017년에 한국정부가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을 해서 정식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1924년에 중국 동북부에서 태어난 김학순 씨는 17세 나이에 북경에서 일본군 장교에게 연행을 당해 「위안부」로서 중국 각지를 끌려가며 일을 강요당하였습니다. 독립 후 한국에 돌아왔지만, 그 후로도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1990년에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끌고 다녔다」라며 일본군의 관여를 부정한 것을 알게 되어, 김학순 씨는 분노에 떨며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던 것입니다.  김학순 씨의 증언은 여성에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풍조 속에서 본인들의 피해를 털어놓지 못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여성들에게 일어서는 힘을 주며, 한국은 물론 아시아 태평양 나라들, 그리고 네덜란드 여성들이 잇따라 본인들도 피해자임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 1992년 1월 8일에 일본의 ‘공식 사과’,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등을 요구하며 구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는 올해 7월 14일에 1500번째를 맞이하였습니다. 김학순 씨는 이 수요집회뿐만 아니라 여러 활동의 선두에 서서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일어 섬을 보고 일본 정부도 마침내 일본군「위안부」조사에 미적미적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학자가 일본군의 관여를 뒷받침하는 공문서를 발견, 1993년에 일본 정부로서 책임을 인정한 「코노담화」가 발표되었습니다.    「코노담화」는 피해 내실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으며 부족한 느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일본이 국가로서 마주 대하는 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침략 식민지지배의 잘못을 없었던 것으로, 올바른 일이었던 것으로 만들고자 역사수정 움직임이 힘을 가지게 되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재판은 잇따라 패소했습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김학순 씨는 1997년 12월 16일에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일어선 피해자들도 한 사람 또 한 사람 이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는 한국정부가 등록한 피해자는 14명입니다(2021년 7월 현재).    그간 2015년 12월 28일 치졸하기 짝이 없는 「합의」, 2021년 1월 8일 국제적인 인권의식의 발로라 해도 과언이 아닌 판결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진일퇴를 되풀이하고 있지만, 피해자나 지원자들의 끈질긴 투쟁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학순 씨 증언으로부터 30년인 올해 8.14에 맞춰서 경기다문화뉴스 협찬으로 칼럼 독자들에게 예쁜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칼럼에 대해 느낌이나 생각, 희망 사항, 그리고 한일 역사에 관한 생각 등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Stand for Human Rights라는 목표를 들어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운동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마리몬드(Marimond) 상품을 추첨을 통해 8분에게 보내드립니다.  메시지 보내는 곳:m_akio74@hotmail.com 마감날:8월 31일 주소, 성명, 연락처를 반드시 기재해주세요. (메시지는 한국어 일본어 둘 다 가능함) 추첨 결과는 발송으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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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4
  • 旭日旗、何が問題なの?ー「鬼滅の刃」から
      <사진 아키오 객원기자>   漫画が原作のアニメーション「鬼滅の刃(きめつのやいば)」に、どっぷりはまりました。大正時代を背景に、人を喰う鬼を追う鬼殺隊の活躍を扱ったSF活劇です。   主人公の竈門炭次郎(かまどたんじろう)は家族を鬼に殺され、鬼にされた妹を人間に戻すために鬼殺隊に入隊、次々にせまりくる鬼との闘いに挑みます。   主人公一行、また柱と呼ばれるスーパー鬼殺隊員の活躍だけではなく、敵である鬼の抱える様々な事情にまで思いを馳せる描写がとても魅力的です。   世界各国、特に韓国でもたいへんな人気を呼び、年明けに公開された劇場版は観客数200万を超え、日本アニメーションの韓国上映観客数ではコロナ禍にも関わらず、「君の名は」や「千と千尋の神隠し」などに並ぶ記録を打ち立てました。   現在ネットフリックスでも好評放映中です。    しかし、それでめでたし、めでたしとならないのが日韓関係の辛いところです。韓国で主人公の炭次郎の耳飾りが問題として大きく取り上げられました。   耳飾りは朝日をモチーフにしたような赤白のデザインで、漫画の中では「花札のような」と表現されています。それの何が問題なのかと日本人の多くはいぶかることでしょう。   ところが韓国では、それが旭日旗を連想させ、「日本帝国主義の象徴だ」と批判され、ついにはネットフリックス、映画からは耳飾りの赤白マークは消されてしまいました。   日本では「韓国はなんでもなんでもかんでもイチャンモンをつける」と、苛つく報道が多く、嫌韓感情を新たにする人もいるかもしれません。    一つのデザインに対する両国の受け止め方の違いはどこから来るのでしょうか?元々朝日をモチーフにし、紅白のハレの印として様々な行事や商標、漁船の旗などに使われている旭日模様ですが、この模様をデザインした旗(旭日旗)は1970年に大日本帝国陸軍の軍旗、1889年には同海軍の軍艦旗として採用されました。   日の丸と並んで大日本帝国の軍隊進軍の先頭にはためき、侵略の歴史の記憶と切り離せないこの旗は、一昔前まではアジア諸国ではたいへん拒否感をもたれていました。   戦後も自衛隊の発足に伴い陸上自衛隊の「自衛隊旗」、海上自衛隊の「自衛艦旗」として採用されています。旭日旗を掲げる海上自衛隊の寄港を韓国側が拒否したこともあります。  日本は植民地支配に対し、今もなお「日本軍"慰安婦"問題」「徴用工問題」などを初めとする戦後責任を果たしたとは言えません。その状況の中で韓国が、旭日模様=旭日旗=日本軍国主義の象徴ととらえ、それを連想させるアニメの主人公の耳飾りに敏感になるのは無理もないと言えます。    もう一つ、「鬼滅の刃」の舞台である大正時代(1912年~1926年)は、韓国では植民地初期にあたります。この時代に対する韓国人の受け止め方にも配慮が必要です。   大正時代はあしかけ15年という短い期間ですが、大正デモクラシー政治的民主化が進み、女学生の袴姿やモボ・モガ(モダンボーイ、モダンガール)などの近代的で華やかなイメージが日本では定着しているようです。しかしこの大正の世は、お隣の朝鮮半島にとっては日本の植民地支配が始まった時期にあたります。    日本は明治から大正への代替わり直前、1910年に大韓帝国を「併合」し、天皇直属の軍人が総督府のトップに立つ武断統治を始めました。「併合」前後からの抵抗運動を武力で押さえ、広範な人々が朝鮮独立を訴えた1919年(大正8年)の3.1独立運動も激しく弾圧しました。   その4年後、1923年(大正12年)の関東大震災時にも朝鮮人虐殺事件を起こしています。植民地から収奪した米、労働力は日本の近代化を下支えしました。    「鬼滅の刃」の作者がどんな意図をもって大正時代を背景とし、炭次郎の耳飾りをデザインしたかはわかりません。ただ、日本のアニメや漫画は今や世界各国の読者に読まれ、日本への親しみを高める優れたツールとなっています。   それを送り出す側としては、国外の読み手への配慮をするのは当然の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ためにはなによりも日本と相手国との歴史を知ることは欠かせません。   これは送り手だけの問題ではなく、日頃私たちがどれほど歴史を意識し、伝えようとしているかに関わっています。   私たちが苛烈を極めた植民地支配の歴史にきちんと向き合うこと、何をしたのか、これから何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を考え実践する必要を、「鬼滅の刃」にはまったこの機会にまた感じさせられました。     만화가 원작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 푹 빠졌습니다.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사람을 먹는 혈귀를 쫓는 귀살대의 활약을 그린 SF 활극입니다.    주인공인 카마도 탄지로는 가족이 혈귀로 인해 죽고 혈귀가 되어버린 여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귀살대에 입대, 잇따라 닥쳐오는 혈귀와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일행 또 주라 불리는 슈퍼 귀살대원의 활약뿐만 아니라 적인 혈귀가 안고 있는 여러 사정까지 생각하는 묘사가 매우 매력적입니다.    세계 각국 특히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불러일으켜 올해 초에 개봉된 극장판은 관객수 200만을 넘어서 일본 애니메이션 한국 상영 관객수로는 코로나 대유행에도 불구하고 「너의 이름은」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 견줄 기록을 세웠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호평 방영 중입니다.    그런데 이걸로 해피엔드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한일관계의 어려움입니다.    한국에서 주인공 탄지로의 귀걸이가 큰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귀걸이는 아침 해를 모티프로 한 것 같은 홍백 디자인이고 만화 속에서는 「화투 같다」라고 표현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많은 일본인은 의아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욱일기를 연상케 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다」라며 비판받아 드디어 넷플릭스와 영화에서는 귀걸이의 홍백 마크가 지워졌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은 무엇이든지 트집 잡는다」라며 초조해하는 보도가 많았으며 혐한감정을 새로이 느낀 이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디자인에 대한 양국의 반응의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원래 아침 해를 모티브로 하는 홍백은 경사스러움의 뜻으로 여러 행사나 상표 어선 깃발 등에 사용되는 욱일 모양이지만, 이 문의를 디자인한 깃발(욱일기)은 1970년에 대일본제국육군 군기, 1889년에는 동 해군의 군함기로 채용되었습니다.    히노마루(일장기)와 함께 대일본제국 군대 진군 선두에 펄럭이며 침략 역사의 기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깃발은 옛날에는 아시아 나라에서 사람들이 매우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전쟁 후에도 자위대 발족에 따라 육상자위대 「자위대기」, 해상자위대 「자위함기」로 채용되었습니다. 욱일기를 든 해상자위대의 기항을 한국이 거부한 적도 있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직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징용공 문제」 등을 비롯해 전후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사람이 ‘욱일 모양=욱일기=일본 군국주의 상징’으로 보고 이를 연상케 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귀걸이에 민감해져도 이해할만 합니다.    또한 「귀멸의 칼날」 무대인 다이쇼 시대(1912년~1926년)는 한국에서는 식민지 초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대에 한국 사람의 반응에도 배려가 필요합니다.    다이쇼 시대는 햇수로 1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며 여학생들의 옷차림이나 모보 모가(모던 보이, 모던 걸) 등 근대적이며 화려한 이미지가 일본에서는 정착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이쇼의 시대는 이웃인 한반도에 있어서는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일본은 메이지부터 다이쇼 대가 바뀌기 직전 1910년에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천황 직속 군인이 총독부 총독이 되는 무단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병합」 전후로부터의 저항운동을 무력으로 누르며 광범위한 사람들이 조선 독립을 외친 1919년(다이쇼 8년) 3.1 독립운동도 격렬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1923년(다이쇼 12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도 조선인학살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식민지에서 수탈한 쌀 노동력은 일본의 근대화를 받쳤습니다.    「귀멸의 칼날」의 저자가 어떤 의도로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탄지로의 귀걸이를 디자인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이제 세계 각국에 많은 독자가 있고 일본에 대한 친근감을 높이는 훌륭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내는 입장이면 외국 독자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과 상대 나라와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저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상시에 우리가 얼마나 역사를 의식하고 전하려 노력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더할 수 없이 가열했던 식민지지배 역사와 마주 볼 것, 무엇을 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필요성을 「귀멸의 칼날」에 푹 빠진 이 기회에 다시금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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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6
  • 法務部、すべての韓国入國外國人に‘活動範圍制限’措置施行
    今月の1日から海外から入國する韓国人·外國人に対して、2週間隔離措置が義務化され、後續措置として法務部は入國するすべての外國人に対して‘活動範圍制限’措置を施行した。 3日、法務部は出入國管理法第22條に従い‘活動範圍制限’措置を施行していると明らかにした。‘活動範圍制限’とは、公共の安寧秩序や韓國の重要な利益のために必要だと認められる場合、法務部長官が韓國に滞在する外國人に対して、居所または活動の範囲を制限したり、それ以外に必要な遵守事項を決める行政命令だ。これに違反した外國人は、出入國管理法第94條によって3年以下の懲役や2000萬ウォン以下の罰金に処される。 法務部は1日以後入國するすべての外國人に対して、入國審査段階で出入國管理公務員が住居制限、隔離時生活守則遵守、違反に伴う法的不利益などが規定された法務部長官の‘活動範圍制限通知書’を發給している。 現在まで出入國管理法第22條が實際に適用されたケースはないが、海外流入感染病豫防のために初めて施行された。 法務部は隔離措置に違反した外國人に対して、檢疫法や感染病豫防法による處罰とは別途に、外國人の行爲が公共の安全を脅かすと認められると、出入國管理法第11條及び第46條により、强制退去や入國禁止處分以外にも、懲役刑や罰金刑など、刑事處罰まで可能にしたと說明した。 一方政府は、コロナ19ウィルス海外流入を遮斷するために、4月1日から海外から入國するすべての人(韓国民及び外國人)に対して、2週間自宅(または施設)隔離措置を施行した。 これに伴い、韓国人及び長期滞在外國人は14日間自宅隔離し、短期滞在外國人は14日間施設隔離、所要費用は自己負担だ。 法務部は施行初日の1日、國內空港を通じて入國した短期滞在外國人のうち、政府のこのような措置に従わず、隔離を拒否した8人について、入國不許可として本國に送還した。 8人は現地搭乘段階から隔離對象であることを前もって案內され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隔離を拒否するなど、政府の措置に従わず、檢疫所から入國が適切ではないと通報された。 法務部は海外流入によるコロナ19擴散に先制的に對應するために、防疫當局と緊密に協調して、自宅(施設)隔離を拒否したり、違反した外國人に対して入國不許可はもちろん、强制退去、 入國禁止など强力で嚴正な措置を取る豫定だ。 法務部關係者は、“今回の措置を施行したのは、最近入國した外國人が檢疫·防疫當局の自宅隔離 措置を守らず、マスクも着用しないまま外部活動を行う事例が相次いでおり、コロナ19の擴散 遮斷と公共の安全のために、活動範圍制限措置が必要だと判斷したため”とし、“すべての隔離對象外國人は、政府と地方自治團體長の許可なく、隔離場所を無斷で離れず、活動範圍制限通知書に記載された遵守事項を守ること”と注意を促した。   아키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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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7
  • “多文化家族も廣域節約(알뜰)交通カードを使って交通費30%節約!”
    多文化家族も廣域交通カードを使うと、‘交通費30%’が削減され、生活費節約の助けになる。 廣域節約カードは政府が大衆交通と步行、自轉車利用を獎勵し、乘用車利用自制をそくし未來交通體系を構築するようにするために導入した。 特に廣域節約交通カード・マイレージは、公共交通利用時歩行と自轉車で移動した距離に比例してマイレージを支給し、カード社割引特典に連繫させた。 利用者がバスなどを利用するために歩いたり自轉車を利用した距離の分だけマイレージを積立る。 マイレージが利用者がアプリを設置すると、スマートフォンGPSを活用し家と會社からバス停留場まで移動した距離を測定して計算される。カード社は月積立マイレージの分だけ次の月に請求割引する。 步行と自轉車で800mを移動した場合、マイレージ1回(乗り換え含む)割引(支給)額は、公共交通利用料が2千ウォン以下の場合250ウォン(20%)、3千ウォン以下の場合350ウォン(17.5%)、3千ウォンを超過した場合450ウォン(15%)だ。 月支援上限額(44回基準)は市內は1萬1千ウォン、廣域は1萬9800ウォンだ。 大気汚染低減措置發令時には乘用車利用縮小のため、該當地域に居州する利用者のマイレージは二倍に積立となる。 民間カード會社では特典をカード社別に提供する。一定條件を満たすと實績區間別1∼4萬ウォン相當の割引特典を提供する。 廣域節約交通カード(信用、チェック)を發給(http://alcard.kr)後、廣域節約マイレージアプリを設置すると使用することができる。 マイレージアプリを使用時には自宅から出發する場合、‘スタート’ボタンを押し、公共交通を利用後、職場(學校)到着時‘終了’ボタンを押せばいい。 ただ利用者は月15回以上利用する場合、マイレージを適用される。旣存乗り換え割引制度はそのまま維持され、全國バス、および地下鐵で使用できる。 昨年下半期示範事業を實施した廣域節約交通カード(以下節約カード)は、利用者ひとりあたり、月平均1萬2246ウォンの交通費割引と集計された。 利用を望む多文化家族は廣域節約交通カードインターネットホームページにて申請可能。   아키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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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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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4 日本軍「慰安婦」メモリアル・デー
    <사진 오마이뉴스>    韓国に住んでいれば、8月15日が日本の植民支配から解放された光復節(日本では敗戦の日)だということはよくご存じだと思います。ではその前日の8月14日が何の日か、皆さんは知っていますか?    8月14日をネイバーで検索してみると、一番最初に「法的記念日、日本軍"慰安婦"被害者メモリアル・デー」とでてきます。この日は日本軍「慰安婦」問題を国内外に知らしめ、日本軍「慰安婦」被害者を称えるために制定された国家記念日です(ちなみに日本で調べてみると「専売特許の日」「裸足の記念日」としか出てきません)。    ではなぜ8月14日なのでしょうか?30年前、1991年のこの日、韓国人女性金学順さんが、韓国で、いえ世界で初めて公に、「自分が日本軍"慰安婦"被害者だった」と実名で公開証言をしました。市民団体がこの日をメモリアル・デーとして、毎年様々な行事、キャンペーンを行ってきましたが、2017年に韓国政府が、「日帝下、日本軍"慰安婦"被害者に対する保護、支援および記念事業などに関する法律」の一部改定を行い、正式に国家記念日としました。    1924年に中国東北部で生まれた金学順さんは、数えで17歳の時に北京で日本軍将校に連行され、「慰安婦」として中国各地を巡り働かされました。独立後の韓国に戻りましたが、その後もたいへん厳しい生活を送りました。1990年に日本政府が「慰安婦は民間業者が連れ歩いた」と日本軍の関与を否定したことを知り、金学順さんは怒りに打ち震え、「私がここにいる」と、ついに重い口を開いたのです。    この金学順さんの証言は、女性に貞操観念を強いる社会的風潮の中で自分達の被害を打ち明けることができず、心身の傷を抱え生きてきた女性たちに立ち上がる力を与え、韓国はもとより、アジア太平洋の国々、そしてオランダの女性たちが次々に自分も被害者だったと証言し始めました。   翌年、1992年の1月8日に日本の"公式謝罪"、"法的賠償"、"歴史教科書記録"などを求めて旧日本大使館前で開かれた水曜集会は、今年の7月14日に1500回目を迎えました。金学順さんはこの水曜集会だけでなく、様々な活動の先頭に立ち、運動を率いました。    被害者の立ち上がりを受け、日本政府は重い腰をあげ、日本軍「慰安婦」の調査に乗り出しました。歴史学者により日本軍の関与を裏付ける公文書が発見され、1993年に日本政府として責任を認めた「河野談話」が発表されました。「河野談話」は被害の内実に詳しく言及しておらず、不足の感は否めませんが、日本軍「慰安婦」問題に日本が国家として向き合うスタートラインとしては評価できます。   ところが90年代後半から侵略、植民地支配の過ちをなかったこと、正しいことだったとする歴史修正の動きが力を持つようになり、日本軍「慰安婦」被害者たちが日本で日本政府を相手に起こした裁判は次々と敗訴していきます。    日本の真の謝罪を受けられないまま、金学順さんは1997年の12月16日に亡くなりました。ともに立ち上がった被害者たちもまた一人また一人とこの世を去り、韓国政府が登録している被害者は14人です(2021年7月現在)。    そしてこの間、2015年12月28日の拙速な"合意"、2021年の1月8日の国際的な人権意識に照らし合わせた判決など、日本軍「慰安婦」問題は一進一退を繰り返していますが、被害者や支援者の粘り強い闘いは続いています。   ☆金学順さんの証言から30年の今年の8.14に合わせて、京畿多文化ニュースの協賛でコラムの読者に素敵なプレゼントをお送りします。   コラムへの感想、ご希望、そして日韓歴史をめぐる思いなど、メッセージをお送り下さい。Stand for Human Rightsを掲げ、日本軍「慰安婦」被害者の運動を支援する社会的企業、マリモンド(Marimond)の商品を抽選で8人の方にお送りします。   メッセージの送り先:m_akio74@hotmail.com 締め切り:8月31日 住所、氏名、ご連絡先を必ずご記名下さい。(メッセージは韓国語、日本語のどちらでも構いません) 当選は発送をもって代えさせていただきま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한국에 살고 있다면 8월 15일이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일본에서는 패전 날)임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날인 8월 14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십니까?   8월 14일을 네이버로 검색해보면 가장 먼저 「법적 기념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라고 나옵니다. 이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하여 제정된 국가기념일입니다.(참고로 일본어로 검색해보면 「전매특허 날」, 「맨발 기념일」만 나옵니다)   그러면 왜 8월 14일일까요? 30년 전 1991년의 이날에 한국인 여성 김학순 씨가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내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며 실명으로 공개증언을 하였습니다.    시민단체가 이날을 기림날로 매년 여러 행사, 캠페인을 진행해 왔다가 2017년에 한국정부가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을 해서 정식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1924년에 중국 동북부에서 태어난 김학순 씨는 17세 나이에 북경에서 일본군 장교에게 연행을 당해 「위안부」로서 중국 각지를 끌려가며 일을 강요당하였습니다. 독립 후 한국에 돌아왔지만, 그 후로도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1990년에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끌고 다녔다」라며 일본군의 관여를 부정한 것을 알게 되어, 김학순 씨는 분노에 떨며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던 것입니다.  김학순 씨의 증언은 여성에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풍조 속에서 본인들의 피해를 털어놓지 못해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여성들에게 일어서는 힘을 주며, 한국은 물론 아시아 태평양 나라들, 그리고 네덜란드 여성들이 잇따라 본인들도 피해자임을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 1992년 1월 8일에 일본의 ‘공식 사과’,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등을 요구하며 구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는 올해 7월 14일에 1500번째를 맞이하였습니다. 김학순 씨는 이 수요집회뿐만 아니라 여러 활동의 선두에 서서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일어 섬을 보고 일본 정부도 마침내 일본군「위안부」조사에 미적미적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학자가 일본군의 관여를 뒷받침하는 공문서를 발견, 1993년에 일본 정부로서 책임을 인정한 「코노담화」가 발표되었습니다.    「코노담화」는 피해 내실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으며 부족한 느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일본이 국가로서 마주 대하는 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침략 식민지지배의 잘못을 없었던 것으로, 올바른 일이었던 것으로 만들고자 역사수정 움직임이 힘을 가지게 되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으킨 재판은 잇따라 패소했습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김학순 씨는 1997년 12월 16일에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일어선 피해자들도 한 사람 또 한 사람 이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는 한국정부가 등록한 피해자는 14명입니다(2021년 7월 현재).    그간 2015년 12월 28일 치졸하기 짝이 없는 「합의」, 2021년 1월 8일 국제적인 인권의식의 발로라 해도 과언이 아닌 판결 등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진일퇴를 되풀이하고 있지만, 피해자나 지원자들의 끈질긴 투쟁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학순 씨 증언으로부터 30년인 올해 8.14에 맞춰서 경기다문화뉴스 협찬으로 칼럼 독자들에게 예쁜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칼럼에 대해 느낌이나 생각, 희망 사항, 그리고 한일 역사에 관한 생각 등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Stand for Human Rights라는 목표를 들어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운동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마리몬드(Marimond) 상품을 추첨을 통해 8분에게 보내드립니다.  메시지 보내는 곳:m_akio74@hotmail.com 마감날:8월 31일 주소, 성명, 연락처를 반드시 기재해주세요. (메시지는 한국어 일본어 둘 다 가능함) 추첨 결과는 발송으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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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4
  • 旭日旗、何が問題なの?ー「鬼滅の刃」から
      <사진 아키오 객원기자>   漫画が原作のアニメーション「鬼滅の刃(きめつのやいば)」に、どっぷりはまりました。大正時代を背景に、人を喰う鬼を追う鬼殺隊の活躍を扱ったSF活劇です。   主人公の竈門炭次郎(かまどたんじろう)は家族を鬼に殺され、鬼にされた妹を人間に戻すために鬼殺隊に入隊、次々にせまりくる鬼との闘いに挑みます。   主人公一行、また柱と呼ばれるスーパー鬼殺隊員の活躍だけではなく、敵である鬼の抱える様々な事情にまで思いを馳せる描写がとても魅力的です。   世界各国、特に韓国でもたいへんな人気を呼び、年明けに公開された劇場版は観客数200万を超え、日本アニメーションの韓国上映観客数ではコロナ禍にも関わらず、「君の名は」や「千と千尋の神隠し」などに並ぶ記録を打ち立てました。   現在ネットフリックスでも好評放映中です。    しかし、それでめでたし、めでたしとならないのが日韓関係の辛いところです。韓国で主人公の炭次郎の耳飾りが問題として大きく取り上げられました。   耳飾りは朝日をモチーフにしたような赤白のデザインで、漫画の中では「花札のような」と表現されています。それの何が問題なのかと日本人の多くはいぶかることでしょう。   ところが韓国では、それが旭日旗を連想させ、「日本帝国主義の象徴だ」と批判され、ついにはネットフリックス、映画からは耳飾りの赤白マークは消されてしまいました。   日本では「韓国はなんでもなんでもかんでもイチャンモンをつける」と、苛つく報道が多く、嫌韓感情を新たにする人もいるかもしれません。    一つのデザインに対する両国の受け止め方の違いはどこから来るのでしょうか?元々朝日をモチーフにし、紅白のハレの印として様々な行事や商標、漁船の旗などに使われている旭日模様ですが、この模様をデザインした旗(旭日旗)は1970年に大日本帝国陸軍の軍旗、1889年には同海軍の軍艦旗として採用されました。   日の丸と並んで大日本帝国の軍隊進軍の先頭にはためき、侵略の歴史の記憶と切り離せないこの旗は、一昔前まではアジア諸国ではたいへん拒否感をもたれていました。   戦後も自衛隊の発足に伴い陸上自衛隊の「自衛隊旗」、海上自衛隊の「自衛艦旗」として採用されています。旭日旗を掲げる海上自衛隊の寄港を韓国側が拒否したこともあります。  日本は植民地支配に対し、今もなお「日本軍"慰安婦"問題」「徴用工問題」などを初めとする戦後責任を果たしたとは言えません。その状況の中で韓国が、旭日模様=旭日旗=日本軍国主義の象徴ととらえ、それを連想させるアニメの主人公の耳飾りに敏感になるのは無理もないと言えます。    もう一つ、「鬼滅の刃」の舞台である大正時代(1912年~1926年)は、韓国では植民地初期にあたります。この時代に対する韓国人の受け止め方にも配慮が必要です。   大正時代はあしかけ15年という短い期間ですが、大正デモクラシー政治的民主化が進み、女学生の袴姿やモボ・モガ(モダンボーイ、モダンガール)などの近代的で華やかなイメージが日本では定着しているようです。しかしこの大正の世は、お隣の朝鮮半島にとっては日本の植民地支配が始まった時期にあたります。    日本は明治から大正への代替わり直前、1910年に大韓帝国を「併合」し、天皇直属の軍人が総督府のトップに立つ武断統治を始めました。「併合」前後からの抵抗運動を武力で押さえ、広範な人々が朝鮮独立を訴えた1919年(大正8年)の3.1独立運動も激しく弾圧しました。   その4年後、1923年(大正12年)の関東大震災時にも朝鮮人虐殺事件を起こしています。植民地から収奪した米、労働力は日本の近代化を下支えしました。    「鬼滅の刃」の作者がどんな意図をもって大正時代を背景とし、炭次郎の耳飾りをデザインしたかはわかりません。ただ、日本のアニメや漫画は今や世界各国の読者に読まれ、日本への親しみを高める優れたツールとなっています。   それを送り出す側としては、国外の読み手への配慮をするのは当然の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ためにはなによりも日本と相手国との歴史を知ることは欠かせません。   これは送り手だけの問題ではなく、日頃私たちがどれほど歴史を意識し、伝えようとしているかに関わっています。   私たちが苛烈を極めた植民地支配の歴史にきちんと向き合うこと、何をしたのか、これから何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を考え実践する必要を、「鬼滅の刃」にはまったこの機会にまた感じさせられました。     만화가 원작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 푹 빠졌습니다.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사람을 먹는 혈귀를 쫓는 귀살대의 활약을 그린 SF 활극입니다.    주인공인 카마도 탄지로는 가족이 혈귀로 인해 죽고 혈귀가 되어버린 여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귀살대에 입대, 잇따라 닥쳐오는 혈귀와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일행 또 주라 불리는 슈퍼 귀살대원의 활약뿐만 아니라 적인 혈귀가 안고 있는 여러 사정까지 생각하는 묘사가 매우 매력적입니다.    세계 각국 특히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불러일으켜 올해 초에 개봉된 극장판은 관객수 200만을 넘어서 일본 애니메이션 한국 상영 관객수로는 코로나 대유행에도 불구하고 「너의 이름은」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 견줄 기록을 세웠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호평 방영 중입니다.    그런데 이걸로 해피엔드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한일관계의 어려움입니다.    한국에서 주인공 탄지로의 귀걸이가 큰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귀걸이는 아침 해를 모티프로 한 것 같은 홍백 디자인이고 만화 속에서는 「화투 같다」라고 표현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많은 일본인은 의아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욱일기를 연상케 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다」라며 비판받아 드디어 넷플릭스와 영화에서는 귀걸이의 홍백 마크가 지워졌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은 무엇이든지 트집 잡는다」라며 초조해하는 보도가 많았으며 혐한감정을 새로이 느낀 이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디자인에 대한 양국의 반응의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원래 아침 해를 모티브로 하는 홍백은 경사스러움의 뜻으로 여러 행사나 상표 어선 깃발 등에 사용되는 욱일 모양이지만, 이 문의를 디자인한 깃발(욱일기)은 1970년에 대일본제국육군 군기, 1889년에는 동 해군의 군함기로 채용되었습니다.    히노마루(일장기)와 함께 대일본제국 군대 진군 선두에 펄럭이며 침략 역사의 기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깃발은 옛날에는 아시아 나라에서 사람들이 매우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전쟁 후에도 자위대 발족에 따라 육상자위대 「자위대기」, 해상자위대 「자위함기」로 채용되었습니다. 욱일기를 든 해상자위대의 기항을 한국이 거부한 적도 있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직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징용공 문제」 등을 비롯해 전후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사람이 ‘욱일 모양=욱일기=일본 군국주의 상징’으로 보고 이를 연상케 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귀걸이에 민감해져도 이해할만 합니다.    또한 「귀멸의 칼날」 무대인 다이쇼 시대(1912년~1926년)는 한국에서는 식민지 초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대에 한국 사람의 반응에도 배려가 필요합니다.    다이쇼 시대는 햇수로 1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며 여학생들의 옷차림이나 모보 모가(모던 보이, 모던 걸) 등 근대적이며 화려한 이미지가 일본에서는 정착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이쇼의 시대는 이웃인 한반도에 있어서는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시작된 시기입니다.    일본은 메이지부터 다이쇼 대가 바뀌기 직전 1910년에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천황 직속 군인이 총독부 총독이 되는 무단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병합」 전후로부터의 저항운동을 무력으로 누르며 광범위한 사람들이 조선 독립을 외친 1919년(다이쇼 8년) 3.1 독립운동도 격렬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1923년(다이쇼 12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도 조선인학살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식민지에서 수탈한 쌀 노동력은 일본의 근대화를 받쳤습니다.    「귀멸의 칼날」의 저자가 어떤 의도로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탄지로의 귀걸이를 디자인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는 이제 세계 각국에 많은 독자가 있고 일본에 대한 친근감을 높이는 훌륭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내는 입장이면 외국 독자에 대한 배려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과 상대 나라와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저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상시에 우리가 얼마나 역사를 의식하고 전하려 노력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더할 수 없이 가열했던 식민지지배 역사와 마주 볼 것, 무엇을 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필요성을 「귀멸의 칼날」에 푹 빠진 이 기회에 다시금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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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6
  • 強制動員と2018大法院判決 ー金英丸さんのお話
    2020年九里歴史倶楽部の下半期は、様々な方をお招きしてオンラインでの講座を開きました。   今回は親日派を網羅した人名辞典発行で有名な民族問題研究所の対外協力室長の金英丸さんに、「強制動員大法院(最高裁判所)判決を中心とした日韓関係」と題して語っていただきました。そのお話を以下にまとめます。    2018年の10月、韓国の最高裁判所は日本の新日鉄住金に対して、強制動員被害者に対して損害賠償をせよとの判決を下しました。その骨子は次の通りです。   『(今回認めるのは)日本政府の朝鮮半島に対する不法な植民地支配、及び侵略戦争と直結した日本企業の反人道的な不法行為を前提とする強制動員被害者の日本企業に対する慰謝料請求権である。このような請求権は1965年に締結された"日韓請求権協定"の対象外である。』    損害賠償の解決が長引いたのは、頑なに侵略、植民支配の不当性を認めない日本政府、またいわゆる戦犯企業の不誠実な態度が原因ですが、韓国政権による日韓関係悪化回避のための裁判取引(判決遅延)が続いたことも事実です。   今回の判決は粘り強く法廷闘争を続けた被害者、支援者と、ロウソク革命により一層民主化が進んだ韓国市民社会の勝利であり、また植民地主義の克服を唱えたダーバン宣言(2001)など、国際的な流れにも沿う画期的なものであると金さんは指摘されました。    日本政府は今回の強制動員判決だけではなく、すべての韓国の被害者に対して、1965年の日韓協定により解決済みだと主張します。しかし協定締結当時、日本は植民地支配の責任を明らかにすることなく、経済支援というたいへん曖昧な形で韓国に対して金銭の支払いを行いました。   この協定で個人の賠償権はなくなったと主張する人たちがいますが、日本政府はシベリヤ抑留被害を訴える被害者には、ソ連政府に対して損害賠償を請求するように言います。    金英丸さんは次のように語りました。「これは韓国政府対日本政府の問題ではありません。若い頃に直接間接的に日本などに連れていかれ、賃金の支払いをされず、苛酷な労働を強いられた者が今は100歳近くなり、その青春を返してくれと訴えているのです。   それに対して申し訳ないと言うべきです。そして青春を返すことはできないからその代りに賠償をするのです。しかし金だけ支払えばすむものではありません。誰が誰に対して、何を謝るのか、誠心誠意謝ることから始まるのです」    「オーストラリア政府が先住民のアボリジニに対する人種隔離と白人化政策の誤りを認め謝罪した時に、アボリジニの人たちが『apology is first step(謝罪は最初のステップだ)』と人文字で示しました。誤りを認めるところから始めることは日本市民のためでもあるのです。   日本にもハンセン氏病問題、満豪開拓団、また空襲被害者など、歴史の被害者はたくさんいます。日本の被害者たちのためでもあるのです。なぜなら日本の歴史問題であり、被害者ひとりひとりの人権問題だからです。」    「ましてやこれは日本政府が相手ではなく、日本の企業です。住金もおそらく被害者に対して賠償金を支払うことで国際的なブランド地位が確立されることを望んでいるでしょう。しかしこれを妨害しているのが日本政府です。せめて企業に口出しせず、高齢の被害者が一日でも早く賠償金を受け取れるようすべきです。」    また金英丸さんは「戦後最悪の日韓関係と言われる昨今ですが、これに対抗する市民の運動も確実に進んでいます。   コロナ禍に対応する各国の対応は民主主義のものさしだと言われています」と言われ、「日本も韓国も今とてもたいへんです。   でも日韓でなにかあったときには一番しんどい思いをされておられるでしょう皆さん、お元気で、いつかお会いしましょう」と励まして下さり、大きく勇気づけられた講座でした。       강제동원과 2018대법원 판결 - 김영환 강의 2020년 구리 역사동아리의 하반기는 여러 인사를 초청해 온라인 강좌를 열었습니다.    이번에는 친일파인명사전 발행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 김영환 실장에게 「강제동원대법원 판결을 중심으로 한일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 내용을 정리해봤습니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본기업 신닛테츠스미킨에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결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번에 인정하는 것은)일본 정부가 한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지배 및 침략전쟁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다. 이러한 청구권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 대상 외이다』   손해배상 해결이 오래 끌었던 것은 완고하게 침략과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인정하지 않은 일본 정부와 이른바 전범 기업의 불성실한 태도가 원인이지만, 한일관계 악화를 피하려 했던 한국정권으로 인한 재판거래(판결지연)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판결은 끈질기게 법정투쟁을 이어온 피해자와 지원자들 그리고 촛불 혁명으로 한층 민주화가 올라간 한국시민사회의 승리였습니다.    또한, 식민지주의 극복을 주장한 더 번 선언(2001) 등, 국제적인 흐름을 따르는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김 실장은 지적하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모든 한국 피해자들에게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번 강제동원 판결뿐만 아니라 모든 배상책임이 해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협정체결 당시 일본은 식민지지배 책임을 밝히지 않았으며, 경제지원이라는 매우 애매한 방법으로 한국에 대하여 금전을 지급하였습니다.    협정으로 개인 배상권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본 정부는 시베리아 억류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들에게는 소련 정부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말합니다.   김 실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한국정부 대 일본 정부 문제가 아닙니다. 젊었을 때 직간접적으로 일본 등에 끌려가서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자가 지금은 100세가 가까워져 청춘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에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춘을 돌려줄 수 없으니 대신 배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돈만 던져버리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사과할 것인지 성심성의 사과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호주 정부가 선주민인 애버리지니에 대한 인종격리와 백인화 정책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을 때, 애버리지니 사람들은 『apology is first step(사과는 첫 스텝이다)』라며 글자를 만들어 호소하였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일본 시민을 위함이기도 합니다. 일본에도 한센씨병문제, 만호개척단, 공습피해자 등 역사의 피해자는 많습니다.    일본 피해자들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문제이며,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는 일본 정부가 상대가 아니라 일본기업입니다. 스미킨도 아마도 피해자에 대해 배상금을 냄으로써 국제적인 브랜드 지위가 확립됨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것이 일본 정부입니다. 하다못해 기업에 말참견하지 말고 고령의 피해자가 하루라도 빨리 배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김 실장은 「전후 최악의 한일관계라고 여겨지는 작금이지만, 이에 대항하는 시민의 운동도 확실히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코로나에 대응하는 각국의 대응은 민주주의 잣대」라며,  「일본도 한국도 지금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일 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가장 괴로움을 느끼시는 여러분, 잘 계시고 언젠가 만납시다」 하며 격려해주시고 많은 용기를 얻었던 강좌였습니다.  아키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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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7
  • 法務部、すべての韓国入國外國人に‘活動範圍制限’措置施行
    今月の1日から海外から入國する韓国人·外國人に対して、2週間隔離措置が義務化され、後續措置として法務部は入國するすべての外國人に対して‘活動範圍制限’措置を施行した。 3日、法務部は出入國管理法第22條に従い‘活動範圍制限’措置を施行していると明らかにした。‘活動範圍制限’とは、公共の安寧秩序や韓國の重要な利益のために必要だと認められる場合、法務部長官が韓國に滞在する外國人に対して、居所または活動の範囲を制限したり、それ以外に必要な遵守事項を決める行政命令だ。これに違反した外國人は、出入國管理法第94條によって3年以下の懲役や2000萬ウォン以下の罰金に処される。 法務部は1日以後入國するすべての外國人に対して、入國審査段階で出入國管理公務員が住居制限、隔離時生活守則遵守、違反に伴う法的不利益などが規定された法務部長官の‘活動範圍制限通知書’を發給している。 現在まで出入國管理法第22條が實際に適用されたケースはないが、海外流入感染病豫防のために初めて施行された。 法務部は隔離措置に違反した外國人に対して、檢疫法や感染病豫防法による處罰とは別途に、外國人の行爲が公共の安全を脅かすと認められると、出入國管理法第11條及び第46條により、强制退去や入國禁止處分以外にも、懲役刑や罰金刑など、刑事處罰まで可能にしたと說明した。 一方政府は、コロナ19ウィルス海外流入を遮斷するために、4月1日から海外から入國するすべての人(韓国民及び外國人)に対して、2週間自宅(または施設)隔離措置を施行した。 これに伴い、韓国人及び長期滞在外國人は14日間自宅隔離し、短期滞在外國人は14日間施設隔離、所要費用は自己負担だ。 法務部は施行初日の1日、國內空港を通じて入國した短期滞在外國人のうち、政府のこのような措置に従わず、隔離を拒否した8人について、入國不許可として本國に送還した。 8人は現地搭乘段階から隔離對象であることを前もって案內され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隔離を拒否するなど、政府の措置に従わず、檢疫所から入國が適切ではないと通報された。 法務部は海外流入によるコロナ19擴散に先制的に對應するために、防疫當局と緊密に協調して、自宅(施設)隔離を拒否したり、違反した外國人に対して入國不許可はもちろん、强制退去、 入國禁止など强力で嚴正な措置を取る豫定だ。 法務部關係者は、“今回の措置を施行したのは、最近入國した外國人が檢疫·防疫當局の自宅隔離 措置を守らず、マスクも着用しないまま外部活動を行う事例が相次いでおり、コロナ19の擴散 遮斷と公共の安全のために、活動範圍制限措置が必要だと判斷したため”とし、“すべての隔離對象外國人は、政府と地方自治團體長の許可なく、隔離場所を無斷で離れず、活動範圍制限通知書に記載された遵守事項を守ること”と注意を促した。   아키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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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7
  • “多文化家族も廣域節約(알뜰)交通カードを使って交通費30%節約!”
    多文化家族も廣域交通カードを使うと、‘交通費30%’が削減され、生活費節約の助けになる。 廣域節約カードは政府が大衆交通と步行、自轉車利用を獎勵し、乘用車利用自制をそくし未來交通體系を構築するようにするために導入した。 特に廣域節約交通カード・マイレージは、公共交通利用時歩行と自轉車で移動した距離に比例してマイレージを支給し、カード社割引特典に連繫させた。 利用者がバスなどを利用するために歩いたり自轉車を利用した距離の分だけマイレージを積立る。 マイレージが利用者がアプリを設置すると、スマートフォンGPSを活用し家と會社からバス停留場まで移動した距離を測定して計算される。カード社は月積立マイレージの分だけ次の月に請求割引する。 步行と自轉車で800mを移動した場合、マイレージ1回(乗り換え含む)割引(支給)額は、公共交通利用料が2千ウォン以下の場合250ウォン(20%)、3千ウォン以下の場合350ウォン(17.5%)、3千ウォンを超過した場合450ウォン(15%)だ。 月支援上限額(44回基準)は市內は1萬1千ウォン、廣域は1萬9800ウォンだ。 大気汚染低減措置發令時には乘用車利用縮小のため、該當地域に居州する利用者のマイレージは二倍に積立となる。 民間カード會社では特典をカード社別に提供する。一定條件を満たすと實績區間別1∼4萬ウォン相當の割引特典を提供する。 廣域節約交通カード(信用、チェック)を發給(http://alcard.kr)後、廣域節約マイレージアプリを設置すると使用することができる。 マイレージアプリを使用時には自宅から出發する場合、‘スタート’ボタンを押し、公共交通を利用後、職場(學校)到着時‘終了’ボタンを押せばいい。 ただ利用者は月15回以上利用する場合、マイレージを適用される。旣存乗り換え割引制度はそのまま維持され、全國バス、および地下鐵で使用できる。 昨年下半期示範事業を實施した廣域節約交通カード(以下節約カード)は、利用者ひとりあたり、月平均1萬2246ウォンの交通費割引と集計された。 利用を望む多文化家族は廣域節約交通カードインターネットホームページにて申請可能。   아키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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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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