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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멈추지 않는 에너지 ‘네팔 귀환 이주노동자, 시타람’(2)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 자료집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어려움, 그 까짓 것 : 저는 강한 사람이에요.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네팔로 귀환한 이후에도 몇 차례 어려움이 있었다. 두 차례나 경제적인 사기를 당한 것이다. ‘경제(돈)’는 지난 7년여 그의 모든 것이다.   여전히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그런데 대출과 부동산 사기를 당해,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비는 있다. 차이는 누군가는 그것에 굴복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이겨낸다는 것일 것이다.   시타람은 후자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움이 그를 찾아왔을 때 오히려 그는 도전적이 된다. 그 어려움을 즐기려고 한다.   “그냥 저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누가 어렵다고 하면 그 일 어떤 일인지 그렇게 어려워요 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그 일을 하게 되면 성공되면 제가 잘했다고 더 격려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는 사업장 차별을 경험하면서도 사장에게 오히려 이렇게 요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는 일이 힘들수록 사장님에게 이렇게 요청하곤 했어요) 잔업 많이 주세요. 돈 많이 주세요. 일 많이 할 수 있어요.”   도전적이면서 시타람은 친화적이다. 대상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그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린다.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는 한국인 동료들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한국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한국의 명절 연휴에, 혼자서만 기숙사에 있어야 할 시타람이 안쓰러워 자신의 본가에 데리고 갔을 정도로, 사장님 역시 그를 각별하게 챙겨주었다. 시타람은 적응력도 뛰어나다. 이주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 대표적인 아이템은 음식이다.   시타람도 초기에는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적응했다. 적응을 넘어서서 ‘한국 음식을 다 좋아’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그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에는 네팔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날 생선(회)’ 까지 포함된다.   “처음에는 (한국 음식) 안 맞았지만 먹다보니 습관 됐습니다. 그리고 후에 나머지 음식들도 모두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음식   다 좋아합니다. 한국에서 못 먹어본 음식이 없습니다. 저는 바다고기 제일 좋아합니다. 지금 굴 나올 때가 아니에요? 항상 맛있는데 있고, 맛없는데 있고. 회도 다 먹었습니다.”   #NEKO HAPPY DREAM : 제가 다 관리를 합니다.시타람의 현재 직장은 카트만두의 NEKO HAPPY DREAM이다. 네코는 한국인이 시타람과 같은 네팔의 귀환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해, 네팔 현지에 설립한 NGO이다. 네코의 사업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영리 분야뿐만 아니라 비영리 분야도 포함된다. 김치 공장을 포함한 농축산업, 문해 학교를 비롯한 인프라가 취약한 네팔 시골의 교육 시설 지원사업, 한국어 어학원 운영 등이 주력 사업이다. 시타람은 카트만두 네코의 책임자이자 한국어 어학원 강사이다. 어학원은 3년 전에 설립되었다.   평균 60명 이상의 수강생이,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한국어 능력시험 합격을 목표로 공부한다. 시타람은 한국으로의 이주를 희망하는 네팔 젊은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어학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카트만두에는 ‘한국어 어학원이 없는 건물이 없을’ 정도이며, 심지어 ‘한 건물에 두 학원이 있는 곳’도 드물지 않을 정도로 한국어 붐이 불고 있다. 시타람은 다른 학원에 비해 저렴한 수강료를 받되, 양질의 교육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십분 활용한다.   시타람과 네코와의 인연은 그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체류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지역의 이주민 지원센터 대표가 바로 네코의 대표였던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시타람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네코를 통해 네팔의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일을 해온 바 있다. 네팔 귀환 후에 그가 사업 구상을 보류하고 네코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그 대표의 권유 탓이었다.   “대표님이 그냥 같이 일하자고, 한국에서 일해도, 네팔에 가서 일해도 같이 일하자고 했어요. 대표님하고 같이 생각이 맞아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한국에 있을 때도 많이 얘기했어요.”   그런 면에서 네코는 단순한 NGO가 아니다(NEKO는 NEpal과 KOrea의 첫 두 음절을 결합한 사명이다). 네팔과 한국, 한국과 네팔이 연대한, 초국가적인 사회적 기업인 셈이다. 바야흐로 성공한 이주노동자 시타람이, 네코를 통해, 성공적인 초국적 사회적 기업가라는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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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1
  • 한국의 이주민 사회 ‘한국에 있는 다양한 외국인주민들’
        1. 결혼이민자(2) 한국인이 외국인과 재혼한 결혼이민자 F-6-1자녀가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이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본 기관에서 가족항공권을 지원하여 공황상태에 있는 이주여성을 친정집으로 잠시 보내어 심신을 달래보기로 하였으나 친정에 가서 오래있지 못하고 곧바로 되돌아오고 말았다.그렇게 어린 아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부모들은 뼈를 깎는 아픔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고 첫째와 너무나 꼭 닮은 아들을 출산하면서 새로운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그 이후 B씨는 K국의 장모님을 초청하여 아이양육과 함께 아내의 심리정서지원을 도우려고 하였으나 반대로 장모님으로 인해 이 가정에 새로운 고민과 가족갈등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이유는 초청받아 입국한 장모님은 불법취업을 해서라도 돈벌이에 나서기를 희망하고 나아가 돈을 벌면 전액 고향으로 송금해버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그러나 B씨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성한 두 아들과 현재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과 장모님 그리고 배우자와 연로하신 홀어머니와 함께 작은 빌라에 일곱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나 비좁은 공간이었다. B씨의 한 달 월급이 180여 만원에 불과한데 장모는 눈치 없이 연일 고기반찬만 요구하고 홀어머니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소와 정리는 전혀 할 줄 모르고 지내다보니 사돈지간에도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고 하소연 하였다.그래서 B씨는 장모님이 고향으로 출국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만 아내와 장모는 이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불법취업을 통하여 돈벌이에만 급급하다보니 재혼 다문화가정의 또 다른 문제이다.이 밖에 특이한 사례로 한국의 중년 여성들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등 여러 국가에서 온 연하의 남성들과 재혼하여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도 상당히 많다. 이들의 만남은 대개 직장에서 일하는 가운데 외국인 남성들의 체류자격 변경으로 만난 커플이 많으며 아울러 한국인 여성을 외국인 남성들의 경제력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특히 결혼이민자들 중 외국인 남성 배우자의 경우 이민다문화 가족정책에서 완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는 여성가족부가 결혼이주여성 다문화가족 중심으로만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다양한 다문화가족 구성원이 이루지면서 정부의 이민정책과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적인 지원서비스 전달체계도 많은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고 본다.한편 재혼으로 이루어지는 국제결혼가정의 부부연령차이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도 많지만 이를 법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3)한국인이 외국인과 재 재혼한 결혼이민자F-6-1한국인 남성이 초혼에 실패하고 외국인여성을 재혼으로 만나 혼인을 하였으나 역시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하여 이혼을 하고 다시 외국인과 재 재혼한 가정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다.재 재혼한 가정으로는 한국인이 한국인과의 초혼에서 사별이나 이혼한 후 재혼으로 국제결혼을 한 후 다시 이혼하고 재 재혼으로 또 다시 국제결혼을 한 재 재혼가정들이다.하지만 초혼이나 재혼 및 재 재혼관계에서 자녀들이 각각 출생하였다면 참으로 복잡한 가족구성원이 되고 만다. 여기서 재혼을 하던 재 재혼을 하던 사람 사는 세상에 다양한 가족구성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심적 고통과 성장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받게되는 수많은 마음에 상처들을 어떻게 싸매고 치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국내외 청소년문제는 대부분 부모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겨난 일이라고 청소년상담전문가들이 말한다. 복잡한 가족구성원 속에서 태어난 아동청소년들은 그야말로 특별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진다. 결혼이주여성과 고충상담을 하다가 우연히 혼인관계증명서를 보게 되었는데 한국인 남성 Y씨는 한국인 여성과 초혼으로 혼인하고 이혼하고 이어서 중국 한족 여성을 만나 재혼을 한 후 이혼하고 또 이어서 베트남 여성을 만나 재 재혼을 하고 살다가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 고충상담을 의뢰하면서 이와 같은 재 재혼가정을 발견하게 되었다.여기에서 눈여겨 볼 사안은 초혼에서 출산한 자녀들은 대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정도의 나이가 되어있는 상황에서 재혼을 하여 자녀를 출산하고 난 뒤 곧이어 이혼하고 곧바로 재 재혼을 통하여 그 사이에 자녀를 또 출산하는 가정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한국인 남편의 귀책 사유로 인하여 이혼을 하는 사례가 많아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대부분 이혼한 결혼이주여성들이 양육 및 친권을 지정받아 양육보호하게 되면서 한 부모가정이나 새로운 다문화가정 구성원 속으로 다시 흡수되기도 한다.이러한 복잡 다양한 다문화가족 가계도속에서 태어난 아동청소년들을 우리사회는 가장 먼저 보듬고 신경써야할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민정책을 다루는 정부나 다문화가족지원을 전담하고 있는 여성가족부에서는 이들을 언급하거나 자세한 통계자료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성가족부는 다문화가족지원법에 근거하여 결혼이주여성들 중심으로만 지원하는 예산이 연간 수백억원에 달하고 있는데 일반 국민들이 이를 자세히 알게 되면 역차별이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국내에는 결혼이민자가 284,000(외국인정책본부 자료 2018. 9. 30. 기준)여명 정도 되는데 이들 중에 귀화자가 126,000여명 정도이며 남성결혼이민자도 26,000여명이나 된다. 이로서 여성가족부가 다문화가족지원법에 근거하여 전국 시·구·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결혼이주여성을 지원하는 실제적 대상자는 131,000여명에 불과하며 이들 중에 이중, 삼중으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이용하는 중복이용자 포함 결혼이주여성은 약 35~40% 정도에 그치고 있다.그렇다면 여성가족부는 전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실제 이용하는 약 5만여명의 결혼이주여성을 위해 건강진흥원과 전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적절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결국 부모들의 재혼과 재 재혼으로 인한 그 피해 당사자는 이주배경 아동청소년들이기 때문에 정부는 여성가족부 아래 지방자치단체를 통하여 결혼이주여성들만을 위한 각종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은 잘하고 있는 정책인가 점검해야 한다.<다음호에 계속, ‘한국의 이주민 사회’ 서점 판매 중>야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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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7
  • 멈추지 않는 에너지 ‘네팔 귀환 이주노동자, 시타람’(1)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 자료집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프롤로그시타람은 네팔 돌라카 출신의 귀환 이주노동자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2009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다. 2016년 귀환할 때 까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네팔에서는 도둑질이나 사업을 하기 전에는 획득하기 어려운 1억원이라는 거금을 벌 수 있었다.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여 10년 전에 한국어 초짜였던 그는 현재 누구보다도 유능한 한국어 강사이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는 숙련인력(E-7) 비자 취득에도 성공하였다. 목표지향적이되 친화적이며, 순응적이되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그였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누구보다 열렬한 친한주의자이며, 한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 현재 네팔에 설립된 ‘NEKO HAPPY DREAM’이라는 NGO의 책임자이자 한국어강사로 일하고 있다. NEKO는 NEpal과 Korea의 첫 두 음절을 결합한 사명이다. 네팔로 돌아간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인프라가 전혀 없는 네팔에서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멋진 2층집을 짓는 것이다. #목적을 위한 삶1 : 지금은 놀러갈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대부분의 성공한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이, 시타람 역시 매우 목적지향적이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목표를 구현하는 일에 집중된다. 그들은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시타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시타람이 한국을 택한 이유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한국에 가려면 무엇보다도 한국어 실력이 필요하다. 한국어와 부의 축적, 이 두 가지 목표를 시타람은 이미 이루었다. 한국에서 7년간 일하면서 그는 ‘1억 정도’를 벌 수 있었다. 네팔에서 1억이란 ‘도둑질을 하던지 큰 사업을 해야’만 가능한 큰돈이다. 한국에서 번 돈의 일부를 투자한 네팔 부동산의 가치도 ‘1억 정도’이다. 그 돈을 벌기(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7년간 거의 쉬는 날 없이 ‘보통 12시간씩’ 일을 했다. 때로는 ‘아침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보통은 12시간 일했어요. 언젠가는 한 15시간씩 한 적도 많고. 토요일에도 일하고, 일요일에도 일하고. 겨울에는 밤 12시까지는 기본이고, 한시, 두시, 세시는 가끔씩.”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그는 결코 허투루 쓰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가르쳤으며, 매제에게는 사업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잘 관리만 하면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자족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지금은 놀러갈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리고 돈도 많이 벌어야 되고. 60되면 그때 놀러 다녀야 되요.” #목적을 위한 삶2 : 저는 좀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한국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 ‘한국어 능력 시험 4급 합격’ 했을 때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한국어 사랑은 극진하다. 그는 현재 NEKO의 한국어 교원이기도 하다. 한국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그의 노력 역시 남달랐다. 한국에 입국하기 직전인 2007년 그는 한국어 공부에 입문했다.한국어 학원에서 두어 달 수강한 후 매일 두세시간씩 오로지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혔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다섯 명의 친구들 가운데 자신만, 네팔 현지에서 치러진 고용허가제 입국을 위한 한국어능력 시험에 합격하였다. 한국에 입국한 후에 그의 한국어 공부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한국인들과는 무조건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쉬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한국드라마” 만을 시청했다. 다른 이주노동자들과는 한국어로 채팅을 했다.“한국어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한국생활 하려면 한국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원래 공부를 좀 자랑스럽게, 좀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그렇게 한국에 입국한 지 3개월 만에 “한국어로 대답까지 할 수 있는 실력”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한국어 공부는 중단되지 않았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비자 전환이다.“E-7 비자를 받게 되면 한국에 계속 있을 수 있다고 들어서 열심히 했어요. 한국에 더 있기 위해서. 그 전에도 한국어공부를 했지만, E-7비자를 얻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그렇게 그는 한국어 “초급, 중급” 과정을 차례대로 이수했고, 한국어 능력 시험에 합격했고, 비자 전환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자 전환에 성공한 이후에도 그의 노력은 계속된다. 10여년 전에 한국어에 입문한 그는 이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이다. 시타람의 목표는 이제 잘 배우는 것에서 잘 가르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공부 많이 했어요. 유투브로도 했고, 책들도 많이 보구요. 다른 선생님들 책들도 많이 보고. (그것들을 참고해서) 제일 쉬운 방법으로 저는 제식으로 가르칩니다. 시간 오래 걸려도 알아듣게.” #어려움과 장애물들 : 너무 힘들었어요.시타람은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이룬 사람만이 내보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유와 자신감으로 충만해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여유와 자신감은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3번이나 유급을 했을 정도로 공부에는 소질이 없는 아이였다. (한국에 가서 많은 돈을 벌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그를 바꾸어 놓은 셈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때는 공부를 못했는데 다음부터는 공부를 잘했습니다.”한국에 입국해서 그가 “너무 힘들었었다.”고 고백하는 어려움의 목록들 역시,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경험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입국 초기 그의 어려움은 한국어, 혹독한 노동 환경과 사업장 차별 그리고 기후, 이렇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사업장에서 그는, 네팔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근력이 필요한 육체노동을 담당해야만 했다. ‘너무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했지만, ‘최저 임금 혹은 그 보다 낮은 시급’을 받거나, 아예 ‘돈을 못 받고’ 퇴사를 해야만 했던 적도 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승진에서 배제된 적도 있다. 자신이 기능을 가르쳐준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 한국인 직원이 먼저 승진을 하는 경험은 그에게도 ‘안 좋고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 반장님은 사실은 제가 가르친 분이에요. 반장님인데 한국분이잖아요. 나는 외국인인데. 저보다 그 회사에 한 3년 뒤에 오신 분이고, 반장이 되고. 외국인한테는 안 시켜줘요. 그거는 실제로는 조금 기분 나쁘기는 해요.”(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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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7
  • 한국의 이주민 사회 ‘한국에 있는 다양한 외국인주민들’
     1. 결혼이민자 (2) 한국인이 외국인과 재혼한 결혼이민자 F-6-1한국인이 이혼이나 사별을 한 후 자녀를 동반하거나 동반하지 않고 외국인 배우자를 만나 재혼한 가정을 말한다.어린자녀를 동반하고 재혼을 했다면 어린자녀는 외국인 계모나 계부를 만나 성장하게 된다. 어린자녀는 계모나 계부를 친모나 친부로 알고 성장하는 자녀들도 있지만 청소년기나 성년이 되면서 자신의 부모가 계모나 계부라고 스스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외국인 계모가 어린자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간 일을 나간다든지, 아니면 아침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잔업근무를 하면서 돈벌이에만 집중한 나머지 어린자녀를 양육하는 일에는 소홀이 한다든지 하여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나 홀로 먹거나 놀거나 공부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나이에 비하여 성인아이로 성장하면서 또래들에 비하여 자존감이 낮고 산만한 아이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재혼한 부부 사이에서 자녀가 출생되면 이복형제나 자매가 된다.이런경우 결혼이주여성은 전처의 자녀와 친자의 자녀와의 차별없는 자녀양육은 당연하건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는 것 같았다. 일부 계모들은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본국 친정 엄마에게로 보내어 양육하다가 학령기가 다되면 귀국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시키지 않거나 초등학교 입학년도 월 직전에 귀국시켜 언어는 물론 주변 친구들 사귀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재혼가정이 있기도 하다.특히 한국인 남성 중 일부는 초혼에서 결혼하여 출생된 자녀들을 결혼까지 시켜 손자 손녀들을 두고 있는 가운데 중년이 되어 재혼한 남성도 있었다. 이들 중년남성 재혼가정 중 부부 연령 차이가 최고 43년이나 되는 재혼 다문화가정도 있었다. K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은 26세인데 한국인 남편은 69세였다.K국의 결혼이주여성이 결혼 6개월이 지나면서 고충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하루 속히 남편의 곁을 벗어나고 싶다고 하면서 빨리 이혼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호소하였다. 이유는 놀랍게도 남편의 성욕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편은 거의 매일 밤은 기본이고 대낮에도 수시로 변태적 성행위를 요구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고통을 털어놓았다. 이 K국의 이주여성은 남편이 성관계에 제대로 응하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억지로 시도하기에 더 이상은 고통스러워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출하여 본 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왔다. 본 기관에서는 남편을 만나 이와 관련하여 상담을 진행하였으나 남편은 여성으로서 오히려 더 좋은 것이 아니냐는 식이었다. 이들 부부는 수차례에 걸쳐 가출과 상담을 반복하는 가운데 K국 이주여성이 급기야 가출, 잠적하면서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그 이후 K국 이주여성의 남편(69세)은 아내의 가출로 인하여 혼자 살게 되자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본 기관에 찾아와 중국조선족이나 기타 국가의 여성들 중에 결혼에 실패한 여성들 있으면 소개 좀 시켜달라고 부탁하며 혼자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추한 욕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결혼이주여성들 중에는 부부연령차이가 평균 10~20년 차이가 나는 케이스가 있는 반면 비슷한 연령대 부부도 있으나 문제는 결혼초기에 언어와 문화적 소통의 문제로 혼자 집안에서만 있어야 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이 많아 가족들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결혼이주여성은 머나먼 타국으로 시집와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문화와 언어로 생활환경에 적응하기까지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결혼이주여성은 입국초기 몇 개월 동안 시간을 혼자서 하루 종일 보내다보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이유없이 화를 낸다거나 분노조절을 못하여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초기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하지만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본 기관에서 상담을 통해 만난 한국인 남편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응대하고 있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결혼이주여성이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생활에 적응을 하려고 고된 과정을 보내는 것은 까맣게 잊고 집안청소를 잘 안한다거나 밤에 성관계를 잘 응해주지 않는다거나 시도 때도 없이 낮잠만 잔다든가 하는 문제로 불만만 토로하고 있는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본 기관의 상담과정에서 한국인 남편에게 아내의 현재 상태를 말해주면서 조금의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언을 해보았지만 결혼이주여성의 성관계 불응에는 이해고 뭐고 용납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재혼한 가정 중에 B씨는 사십대 초반에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둘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K국의 여성과 재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갔다.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쁘고 귀여운 아들이 4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유는 할머니가 빌라 옥상에 잠시 올라가서 일을 하고 있는 사이 손자 녀석이 할머니 몰래 옥상에 올라와 놀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손자가 노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평소와 같이 옥상 출입문을 잠그고 내려가고 말았다.이에 어린 손자는 뒤늦게 옥상출입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굳게 잠겨버린 문을 열수 없게 되자 혼자서 옥상에서 내려오기 위하여 울며 온갖 발버둥을 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가족들은 이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해가 저물어 어둠이 짙어가는데에도 아이가 보이질 않자 그때서야 온 식구들이 나서서 아이를 찾아 동네어귀를 돌아다녔지만 아이는 끝내 보이질 않았다.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온 식구가 몇 시간 동안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걱정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빌라 앞에 동네주민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하며 달려가 보니 그렇게 애타게 찾던 바로 그 아들이었다. 그 아이는 혼자서 옥상에서 몇 시간을 울며 옥상 탈출을 시도하다가 결국 4층 빌라 아래로 추락하여 참혹하게 즉사하고 말았다.가족모두가 망연자실하는 것은 물론 결혼이주여성과 재혼남편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 슬픔과 고통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악몽의 시간으로 이들 가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한국의 이주민 사회’ 서점 판매 중>야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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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9
  •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사하닷’(2)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방글라데시와 한국문화는 70% 이상 다르다고 생각해요 : 조심해!“한국 공장에서는 기계를 많이 쓰잖아요. 다치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그냥 만지지 말고 한국 사람들에게 꼭 물어보고, 먼저 설명을 들은 후에 만지라고 말해주곤 해요.” 준법정신 혹은 질서 의식도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익혀야 하는 새로운 규범이다. “한국의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해줘요. 길거리나 은행 등 어디서나요. 한국 사람들은 잘 지키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안 지키거든요. 운전을 할 때도, 면허를 반드시 먼저 따고, (오토바이의 경우) 헬멧을 꼭 써야 한다는 것도 알려줘요.” 기후와 음식의 차이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중요한 관문에 해당한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한국의 겨울은 혹독하기만 하다. 사시사철 따뜻한 나라 방글라데시에서 사람들은 12도 정도만 되어도 “추워서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한국에 와서 첫 겨울은 추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운 건 참을 수 있는데 추운 건 못 참아요. 그래서 동료들에게 한국 겨울은 추우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이야기 해줘요.”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문화 아이템은 ‘종교와 음식(술)’이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그들은 형식적이건 실질적이건 모두 종교인으로 태어나고 종교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100퍼센트’종교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다르다. 종교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는 있으나 종교적인 삶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백퍼센트 종교적인 사회 방글라데시에는 종교가 금하는 ‘술 문화’는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술이 메인디쉬일 경우가 상당수인 한국의 회식문화는 이런 점에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는 가장 ‘조심해’야 할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방글라데시에는 없는 문화는 술 문화예요. 방글라데시에서 술 먹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요. 먹는 사람이 있다 해도 몰래 숨어서 먹고, 나쁜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요.” 적응에서 통합으로 : 제도를 활용할 것한국 생활 적응 ‘기초반’에서 요구되는 기술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경계심(조심성)이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한국 생활의 어려움은 반감될 수 있다. 그러나 적응 ‘심화반’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술이 요구된다. 사하닷이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방법은 한국의 제도를 체계적이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법무부에서 주관하는 이민자 사회통합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통합은 이민자들의 한국 사회 적응 및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한국어 및 한국 문화, 한국 사회 이해 교육 등이 제공된다. 5단계로 구성된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이민자들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귀화 신청 시 필기 및 면접시험이 면제되고 영주자격이나 거주 자격 신청 시에는 한국어 능력 입증 의무가 면제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하닷은 한국이라는 녹록치 않은 이주의 공간에 소극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매개’이자 ‘통로’로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성공적인 전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사회통합 프로그램 이수를 위해 다른 친구들 7명과 스터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스터디 모임은 계속되고 있다. “오래 살아서 한국문화를 안다.”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통해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사통은 수업을 너무 오랫동안 하는 것이 어렵지만 다른 것은 다 좋다고 생각해요. 한국 선생님들이 착하고, 잘 가르치고, 재밌게 가르쳐 줬어요. 한국 문화, 사회에 대한 내용으로 내용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오래 살아서 한국문화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수업에서 배우는 것도 많아요. (사통을 통해)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하면 비자 바꿀 수도 있어요.” 사하닷이 사회통합 프로그램의 혜택을 동료들과 공유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프로그램 참가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것이다. 한 지역의 경우 전체 사통 참가자의 70%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었는데, 그들에게 프로그램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다. 또 한 가지는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통해 체류 자격 변경에 성공한 사람들을 모아 공동체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사하닷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비자변경 2관왕이다.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동료들에게 전수하기를 원한다. 공동체의 이름은 “Get together”이다. 자유의 공간에서 :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비자변경을 통해 적응의 공간을 자유의 공간으로 변모시킨 사하닷이 집중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우선 사업이다. 2018년 초 시작한 첫 번째 사업의 아이템은 ‘간식’이었다. 방글라데시 동료들이 한국에 입국할 때 마다 고향에서 간식을 사가지고 온다는 것에 착안하여 간식 공장을 설립하였다. 첫 번째 사업은 몇 달 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으나 유통경로를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구상하는 두 번째 사업 아이템은 ‘오퍼상’, 일종의 중개 무역업이다. 이를테면 방글라데시에서는 ‘저렴한’의상을 수입해서 한국에서 판매하고, 한국의 농기계를 (농기계가 매우 필요한) 방글라데시에 수출하는 것이다. 사업만큼이나 그가 공들이는 것은 사회 활동이다. 그는 한달에 한번씩, 방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법률 및 생활 상담을 해주고 있다. 필요한 경우에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통역에 나서기도 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계하는 커뮤니티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다음 목표는 이 두 가지 일을 결합하는 것이다.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 그를 기반으로 공적인 사회활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자라나는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육 시설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적인 목표다. “한국에서 사업이 잘 되면,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그 곳에서 학교 끝난 아이들을 데려다 공부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어도 가르쳐주고 방글라데시어도 가르쳐주는. 아이들이 한국에 오면 한국말만 써서 방글라데시어를 잊어버릴 것 같아요. 계속 가르쳐야 해요.”이 일을 위해 “직장을 옮길 수도 있고,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도 할 정도로 커뮤니티 기반의 사회활동은 사하닷에게 소중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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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9
  • 성남이주민센터 쉼터에 머무는 산업재해 입은 외국인 근로자 이야기
        성남이주민센터(센터장 조혜숙) 남성쉼터에는 7명의 외국인근로자들이 머물고 있다. 회사 기숙사에서 거주하며 열심히 일을 해야 할 이들이 민간단체 쉼터에 머무는 이유는 뭘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거주자들은 산업재해 피해자들이다. 이들이 회사에서 근무를 하다가 민간단체 쉼터로 흘러 들어온 과정을 보면 한국 사회가 필요에 의해 불러들인 근로자들을 온전히 대우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7월 5일 태국 출신 외국인근로자들을 성남이주민센터에서 만났다.   사례1) 워라차이(30세) 씨는 울산의 자동차공장에서 근무하다가 프레스 기계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아 오른손 손가락 4개가 절단됐다. 보통 손가락이 절단되면 손가락을 찾아서 환자와 함께 긴급히 봉합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어쩐 일인지 누구도 손가락을 챙겨주지(?) 않았고 결국 워라차이 씨는 손가락 4개를 모두 잃고 말았다. 프레스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것도 의문으로 남는다. 요즘 프레스기들은 대부분 안전기능이 있어서 손을 인식하고 작동을 멈춘다. 그러나 워라차이 씨가 근무할 때는 이런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프레스기가 손가락을 절단하는 사고가 났다.워라차이 씨도 이런 사실을 잘 알지만 누구도 왜 프레스기의 안전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사례2) 쏨폽(23세) 씨는 경기도 양주의 염색가공 공장에서 기계 사고로 오른손 검지가 절단됐다. 오른팔 뼈도 부러져 신경이 손상됐고 결국 중지, 약지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한다. 쏨폽 씨는 사고 직후 사업주가 병원을 방문해 산업재해에 따른 모든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그러나 이후 사업주는 잠적했고 현재 병원 치료비를 직접 부담해야 할 처지가 됐다. 사례3) 산업재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듯이 한국을 떠난 이도 있다. 양계장에서 일하던 쁘라욧(가명) 씨는 기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선풍기가 고장 났으니 고치라는 강요를 받았다. 머뭇거리다 강요가 이어지자 선풍기를 분해했는데 그만 선풍기가 돌아가면서 손가락을 잃었다. 하지만 선풍기 수리는 양계장 일이 아니므로 산업재해를 적용해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결국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쁘라욧 씨는 조혜숙 센터장이 모금해서 전달한 20만원을 받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 뒤 지난 2월 고국으로 떠났다. 산업재해는 어느 산업현장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외국인근로자의 산업재해 발생률(0.91%, 2014)이 내국인 근로자의 그것(0.50%, 2014)보다 약 2배 가량 높다는 얘기도 하지 않겠다. 문제는 산업재해를 입은 외국인 근로자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산업재해를 입은 외국인근로자는 노동력을 상실하고 장기간 요양치료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때 주로 비숙련 노동자 비자(E-9)로 입국한 이들은 이 비자를 유지할 수 없다. 노동력을 상실했으므로 E-9 비자를 박탈하고 ‘질병과 사고로 치료 중인 외국인’ 비자(G-1-2)를 발급한다. 이 때 정상적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한국에서 쫓겨나야 할 상황에 처한다. 사례1)의 워라차이 씨 역시 사고 직후와 달리 회사 측이 태도를 바꿔 ‘너의 실수로 사고가 났으니 산업재해 처리를 해 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산재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일을 하지 못하니 회사 기숙사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쫓겨난다. 결국 성남이주민센터 쉼터와 같은 곳으로 몰려들 수 밖에 없다.  조혜숙 센터장은 “쉼터에 머무는 산재 외국인 노동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음에도 수술과 사고 당시의 트라우마 등으로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기 때문에 간수치가 매우 높게 나온다”며 “이런 경우 별도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산업재해 치료 대상이 아니다. 결국 G-1-2비자로는 건강보험 가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높은 병원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센터장은 또 “산업재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노동력 등을 평가하지 말고 기존 체류자격을 인정해 줘야 한다”며 “산업재해를 입은 외국인근로자들이 민형사상의 권리를 보장 받고 정당하게 사업주와 다툴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업재해를 입은 외국인 근로자를 취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통역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그랬지만 더 이상 한국 사회에 어떠한 신뢰와 믿음도 갖지 않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마음을 기자는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취재 내내 다소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질문에는 단답형의 소극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다. 1차 취재를 마치고 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2차 설문에는 ‘한국 정부에 원하는 것이 없다’는 외국인근로자의 답변이 여럿 나와 기자에게 비수처럼 박혔다. 송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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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남
    2019-08-06
  • 한국의 이주민 사회 ‘한국에 있는 다양한 외국인주민들’
      1. 결혼이민자 (1)한국인과 외국인 초혼 결혼이민자 F-6-1 한편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하여 결혼한 V국의 일부 결혼 이민자들 가운데는 입국하자마자 취업을 원하고 있으며 아울러 급여를 받으면 전액 친정집으로 송금해버리는 사례로 인하여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혼이민자의 한국인배우자 남성으로서는 아내의 그러한 행동에 납득이 안 되고 아울러 나날이 부부 간에 불신만 쌓여가다가 결국 이혼을 하게 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한국 속담에 아내가 귀엽고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고 한다. 국제결혼가정 중 극히 일부분의 철없는 한국 남성은 결혼초기에 아내가 예쁘고 사랑스러워 처갓집으로 용돈을 매월 50~100만원까지 송금을 해준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되어가면서 경제적 능력의 한계로 송금액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여 매월 10~20만원만 송금하게 되었다. 그런데 철없는 일부 결혼이주여성은 매월 남편이 처갓집으로 송금해주는 금액이 결혼이주여성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의 척도로 이해하면서 남편보고 ‘오빠 사랑이 식었어?’ 하면서 그때부터 부부간에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하여 결국 매월 결혼 초기에 송금해준 금액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두 사람은 결국 이혼 길에 서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결혼이란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상호 신뢰와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되는데 일부 결혼이민자들 중에는 오직 돈이 목적이 되어 결혼생활을 그르치는 경우가 너무 많아 안타깝다. 그렇기 때문에 다문화가족정책과 행정에 있어서 국제결혼 첫 단추부터 지원해야할 대상자를 분명하게 선별하여 그에 맞는 눈높이 교육과 정책 및 행정을 펼쳐야 한다. 기억에 남는 결혼이민자 초혼 다문화가정의 상담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동남아시아 V국가의 결혼이주여성인데 결혼 후 첫아기를 출산하고 3일 만에 아기와 함께 시집으로부터 쫓겨나 이주여성 긴급센터에 보호를 받는 사례가 있었다. 이주여성 긴급센터 관계자에 의하면, 아기와 함께 보호하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을 출산한 자녀와 함께 자국으로 동반 출국을 시켜야 되는데 출산한 아기의 여권을 만들지 못하여 출국을 못시키고 있다며 아기여권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상담이었다. 이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V국의 결혼이주여성은 결혼 1년 전 자국에서 한국인 배우자와 며칠만난 후 결혼약속을 하고 한국인 배우자로부터 결혼초청 비자서류를 받아 입국하기까지 약 3개월 정도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중에 자국의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한 것이 임신이 된 사실도 모르고 결혼초청비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지냈다. 그러다가 뒤늦게 한국으로부터 결혼이민자 초청서류를 받고 입국하여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아기를 출산했는데 아이의 외모를 보고 시집식구들이 이상하게 여기면서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결과 친자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어 산부인과에서 산후조리 중 시집으로부터 쫓겨난 케이스였다. 아기는 엄마의 나라 V국적의 여권을 만들어야 되는데 V국 한국주재대사관에서는 아기아빠를 동반하고 방문해야 만이 아기 여권발급이 가능하다고 하나 실상 아기아빠는 V국에 있으며 누군지 정확히 알 수도 없으며 알아도 한국에 쉽게 입국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주여성 긴급센터 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관할 출입국사무소를 방문하여 V국의 결혼이주여성의 이러한 사연을 소개하고 아이를 동반하여 하루 속히 자국으로 출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하면서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기관에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는 수없이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기관에서는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법무부와 외교부에 동시다발로 민원을 제기하였지만 아기여권발급은 전적으로 V국 대사관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국내 공공기관에서는 아기여권발급에 관한 협조요청 공문발송 외에는 별다른 방안이 없다는 답변만을 받았다. 또한 공공기관에서는 V국 주재대사관에 공식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지만 만약 하게 되면 내정간섭으로 오해받기 쉬워서 V국의 결혼이주여성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변만 거듭 되돌아 왔다. 그런데 외교부 관계자 한분이 국민신문고의 민원을 읽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주셨다. 이 케이스는 V국의 한국주재대사관의 고유 업무라 공식적인 라인을 통하여 요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비공식라인을 통하여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귀띔을 해 주었다. 그래서 비공식 라인을 통하여 V국의 한국주재대사를 잘 아는 인맥을 찾게 되었고, 이러한 사연을 전달하면서 협조를 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던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어 곧바로 관련 서류를 준비하여 아기여권을 발급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기가 첫 돌이 될 무렵 엄마와 함께 출국을 하게 된 사례가 있었다.이렇게 쉽지 않던 문제를 해결하고 보니 전국에 이와 같은 유사한 사안으로 인하여 출국을 못시키고 있는 결혼이주여성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필자가 운영하고 있는 기관으로 문의가 쇄도해 오기도 하였다. 또한 사례로 결혼중개업체를 통하여 부모님들의 성화와 도움으로 비슷한 연령대에 있는 V국의 이주여성과 결혼한 다문화가정이 있었는데 이들 부부의 사이가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런데 이들 부모님들이 본 기관에 방문하여 상담을 요청하면서 사이가 좋은 아들 부부를 이혼시켜야 한다고 난리였다. 이유인즉 아들 부부는 부모와 함께 단독주택 아래위층으로 나뉘어져서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부모님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녀들 집에 들락거리며 온갖 간섭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아버지가 아들 부부의 집을 방문했는데 며느리가 그 시간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시아버지가 잠자는 며느리의 방에 들어가 이불을 확 걷어붙이는 일이 있었다. 이에 며느리는 너무나 심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고 이후부터는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시어머니와도 날이 갈수록 관계가 악화된 케이스였다. 그러나 이에 상관없이 아들 부부의 금슬은 날이 갈수록 더욱 좋아지고 있는 반면 시부모님들과의 관계는 계속하여 나빠지고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한국의 이주민 사회’ 서점 판매 중>야스미디어
    • Local-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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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6
  • 노동자에서 사업가로, 사회활동가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사하닷’(1)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프롤로그…사하닷은 방글라데시 브라만바리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이다.(사진 아래 오른쪽)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인 그는 대학원 졸업 후 금융회사에서 1년 정도 근무하다 2008년 한국에 입국했다. 입국 초기 여느 이주노동자와 다름없이 그 역시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이라는 혹독한 적응기를 경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노동자들과 달랐다. 한 번도 어렵다는 두 번의 비자변경에 성공해 취업과 가족동반이 자유로운 ‘거주’ 이주민 자격(F-2)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10년 전 노동자였던 사하닷은 이제 사업가요, 사회활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단순한 적응을 넘어 좀 더 큰 자유를 갈망했던 이유는 한국을 단순한 이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한국은 앞으로 가족과 함께 살아갈 ‘친절하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그는 친절하고 아름답지만 고향의 문화와는 70퍼센트 이상이 다른 이 나라에서, 방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이 조금이나마 어려움을 덜 겪으며 꿈을 이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업만큼이나 그들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선다. 동료들에게 그는 믿음직한 한국 생활의 길잡이요, 안내자이다. 특히 그는 열렬한 사회통합 프로그램 전파자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다. 살기 편하지만 오기 힘든 나라 :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어요.사하닷은 2008년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 그는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방글라데시의 엘리트이다. 졸업 후 1년여 금융회사에 근무했던 그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간명하다. 방글라데시의 상황이 젊은 엘리트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한국의 70~80년대 정치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일자리도 없고, 취업을 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지요.” 한국에서 지낸 지난 10여년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0년 잠깐 귀국하여 취업 준비 기간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필해주었던 아내와 결혼하였다. 2014년 말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꿈꾸는 비자 변경, 그것도 두 번이나 연속으로 성공하였다. 그 결과 그의 위상은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E-9)에서 ‘전문인력’(E-7)으로, 전문 인력에서 취업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부여받는 ‘거주민’의 지위(F-2)로 격상되었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직업을 바꿀 수 있다. 고용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가족을 초청해서 함께 살 수도 있다. 그는 그러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하던 사업을 잠시 접고 현재는 제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조만간 가족들과 재결합할 것이고, 그 때에는 다시 사업에 전념할 계획이다. 그에게 한국은 이제 이처럼 ‘살기 편한 곳’이고 ‘사람들도 다 친절’한 곳이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현재의 자유와 편안함은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을 이미 끝낸 사하닷이기에 누릴 수 있는 보상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그렇지만 오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방글라데시 동료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한다. 그들의 한국 생활 도우미요,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싶어한다.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방글라데시 사람이 많은데, 과거보다 더 어려워졌어요. 제가 올 때보다 10배 가량이나 어려워졌어요. 돈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해도 한국에 입국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어렵게 한국을 선택한 그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희망의 공간 한국 그러나 : 한국일은 어렵고 힘들어요다른 나라로 이주를 선택한 방글라데시 사람들 조차 희망할 정도로 한국은 인기있는 이주의 목적국이다. 그러나 ‘희망의 공간’은 어려움과 난관을 이겨낸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한국 적응은 끝났다.”라고 사하닷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지난 10여년의 한국 생활 동안 그만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경험하고 그를 극복 혹은 관리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자’로서 사하닷은 가스밸브 제조회사, 고무공장, 스폰지 제조공장, 농기구제조업체 등에서 일한 바 있다. 그 곳에서 그가 경험한 ‘어렵고 힘든’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 째 사업장의 고용주는 계약과는 다르게 그에게 지사 근무를 강요했다. 혹독한 노동 조건과 노동 강도는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공통적이었다. 고무 공장의 유독가스는 견디기 어려웠다. 농기구제조업체의 페인트 작업은 특수마스크를 착용하고도 한 시간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이나 안전 장구는 사비로 구매해야만 한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혹독한 조건에서, 하루 열네시간에 가까운 고강도 노동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예외 없이 처우와 승진에서의 차별과 불이익을 경험해야만 한다. 사하닷의 경우 퇴직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업주를 노동부에 진정해서, 일부를 받아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승진에서의 차별은 그에게도 여전히 ‘넘사벽’의 장애물이다. “5년 이상 일을 잘 했는데요, 한국사람 및 다른 외국인과의 차별이 있어서 퇴사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인과 중국인의 경우는 2년만 지나도 반장이나 과장으로 승진을 시켜주었는데,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나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사하닷은 방글라데시 동료들에게 ‘희망의 공간’의 현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어요.” 방글라데시와 한국문화는 70% 이상 다르다고 생각해요 : 조심해!사하닷이 평가하기에, 한국 문화와 방글라데시 문화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크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가 결정적인 어려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 그것은 ‘조심’이다. 그래서 한국에 처음 온 동료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에게 그가 맨 처음 하는 말은 “조심해!”이다. 가장 많이 하는 말 역시 “조심해!”이다. 그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조심’의 목록에는 ‘노동 규율, 법질서, 추위, 음식 및 회식 문화’ 등이 포함된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노동 규율이다. 사업장 내에서의 안전이다. 주지하다시피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율은 한국인 노동자의 무려 6배에 달한다. 낯선 사업장에서의 정보 부족이 외국인 산재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사하닷은 공장에서 서두르지 말고 조심할 것을 가장 강조한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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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6
  • 내가 베트남의 태권도 부흥사 ‘베트남 귀환 이주노동자, 반흥’(3)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쉬운 일은 없어요. : 변화와 도전, 마다하지 않을 뿐이죠.“회사 폐업이 결정된 후 구조조정을 할 때 직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어요. 어제도 협박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러나 그는 담담하다. 같은 민족 노동자들로부터 오해와 협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자신의 선택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제가 관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옹호하게 되니까 노동자들은 제가 한국 사람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서운하기도 했지만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는 동료들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폐업 절차를 밟고 있는 미래가 없는 회사이지만 “대표님과 청산 작업이 마무리 될 때 까지 남아있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생산직’에 종사할 때 배운 워드를 ‘사무직’ 모드로 전환하는 일 역시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8년여 삶을 경험한 그에게 ‘생활 및 생산’ 관련 한국어에는 능숙하다. 한국에서 토픽 3급도 획득하였다. 그렇지만 ‘사무직’으로서 그에게 한국어는 다시금 미지와 무지의 영역에 해당된다. 사무 관련 용어들 대부분은 ‘번역’이 필요할 정도로, 그에게도 낯선 언어들이다. 새로운 과제를 다루는 그의 방법은 한결같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 반드시 “기록한 후, 집에 가서 사전으로 찾아보고 공부” 하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계획과 꿈 :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한국사랑현재 직장이 폐업된 후 재취업에 대해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넘쳐나는 추천과 스카웃 제의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 취업도 어렵지 않아요. 법인장님이 현재 회사 폐업되면 일하라고 회사도 소개시켜주었고 근로조건도 더 좋은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거절했어요. 아내 회사 사장님이 스카웃 제의를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내랑 같은 회사 다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절했어요.” 그가 생각하는 가장 유력한 다음 번 직장은 퇴직한 상사가 설립한 ‘기업용 발전기 원자재 수입 제조업체’에서 ‘총괄 매니저’로 일하는 것이다. “그 상사가 한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해서 발전기 회사에 공급하는 업체를 만들 계획인데 총괄매니저로 일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그 분이 영업 및 투자계약을 하면 제가 부품조달 등을 총괄하는 거죠. 지금 회사 마무리 되는대로 10월 중부터 시작할 계획이에요.” 귀환이주노동자로서 성공 가도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국을 떠난 지가 5년여가 이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대한 그의 그리움,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그의 동경은 결코 작아지지 않고 있다. “집안 형편이 좀 더 좋았더라면 한국에 유학 오고 싶었어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한국에서 생활한다면, 한국어도 더 열심히 배우고 가족들도 초청해서 한국에서 같이 살고 싶어요. 가족을 초청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부럽기만 해요. 물론 제가 일하던 당시에는 지금처럼 (가족 초청이 가능한) 비자를 변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요.” 에필로그…반흥은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다.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다.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신의를 지킨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중요한 것은 베트남과 한국,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두 사회 모두에서 반흥의 이와 같은 캐릭터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도전적이었던 것처럼 베트남에 귀환에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성취는 그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존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의 특별한 점은, 오롯이 개인의 역량으로 이루어낸 개인적인 성취들이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려고 한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청소년들에게 태권도를 전수하여 그들의 미래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반흥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이다. 그 ‘사회’가 베트남과 한국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글로벌 리더이기도 한 사람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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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5
  • 내가 베트남의 태권도 부흥사 ‘베트남 귀환 이주노동자, 반흥’(2)
      국내 최고의 외국인주민 인권 옹호 기관인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소장 오경석)는 지난해 12월 ‘2018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로 ‘경기도, 우리에게 맡겨요’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주노동자 리더십 발굴 프로젝트는 한국 사회에 가득 차 있는 이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 문화적으로 낯선 이주의 공간에서, 길지 않은 시간에,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외국인주민을 발굴해 소개하는 작업은 우리 곁의 이주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일곱 명의 이주민들을 따라가 보자. #이주노동, 어렵지 않았어요,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물론 그 역시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향수병과 언어 장벽, 기후의 차이, 문화의 차이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과 좌절의 시기는 한국에 입국한 초기 ‘두 달’에 불과했다. “한국에 와서 가장 기뻤던 때도, 슬펐던 때도 첫 두 달 이었던 것 같아요.” 두 달 간의 막막함은 첫 월급을 받으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100만원의 첫 월급을 받고, 거금인 1천 달러를 고향에 송금하고도 돈이 남은 그는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된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이후 그의 한국 생활은 ‘축복’의 연속과도 같았다. 그가 송금한 돈으로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멋진 집이 지어졌다. 2009년에는 아름답고 유능한 고등학교 동창과 결혼도 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아이가 태어났다. 이제 여덟 살인 큰 아들은 벌써 “태권도를 하고 있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해”, 태권도가 전부인 아빠를 기쁘게 해주고 있다. 한국 생활은 돈과, 집, 태권도, 사랑과 가족 이외에도 그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해주었다. 그는 한국어 토픽 3급을 획득했고, 자동차 정비술을 익혔으며, 컴퓨터 프로그램에 참가해 워드나 액셀 등 사무용 프로그램 사용법도 익힐 수 있었다. #축복이 실현되는 방법 : 제 한국 생활 잠깐 소개할게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것이 술술 풀릴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쉬워 보이는 그의 한국 생활, 그러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 순간 수긍이 간다. 아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축복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 그가 반흥이다. 일단 반흥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친화적이다. 첫 직장인 안산의 동파이프 공장에는 이미 여러 나라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다른 외국인들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두번째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성의 식품회사였는데, 그는 그 곳의 분위기를 ‘한 가족 같다’고 표현한다. “화성에 있는 식품 회사는 직원들이 거의 가족, 친족이었어요. 한 가족 같아서 제가 그래서 일하기로 했어요.” 친화적이지만 그는 치밀하고 담대하기도 하다. 한국에 온 지 불과 일주일 후,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동료가 회사에서 무려 7킬로미터가 떨어진 피씨방에 반흥을 택시로 데려다 준 적이 있다. 다음 주부터 반흥은 방글라데시 친구의 도움도, 택시 기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그 피씨방을 이용할 수 있었다. 택시가 가는 경로를 일일이 노트로 기록한 후, 그 노트를 보고 걸어서 피씨방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택시가 어느 경로로 가는지 노트로 일일이 다 적었어요. 그 다음 주부터 일요일마다 노트를 보고 약 한 시간 반을 걸어서 그 피씨방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채팅을 했어요.” 부지런함과 성실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자산이자 매력이다. 그가 태권도는 물론이요, 한국어, 컴퓨터, 자동차 정비 등 각종의 기능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친구들이 놀러’ 다니는 일과 후 저녁 시간과 주말을 온전히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 놀러 다닐 때 열심히 한국어 공부해서 토픽 3급도 취득했어요. 일 없을 때는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어요. 저녁에는 스스로 공부해야 했어요.” 성공적인 귀환 : 전 돌아와서도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있어요. 이주노동자들이 출신국으로 귀환해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고된다. 목적국에 적응하는 것만큼이나 몇 년 혹은 십여년 이상 떠나있던 출신국에 다시 적응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재결합하는 문제며, 재취업하는 문제 등이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한 번 이주를 경험한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적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이주를 선택하게 된다고들 한다. 이 점에서도 반흥은 예외다. 그의 귀환은 성공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모범사례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출퇴근을 한다. 맞벌이를 하지만 육아 걱정도 없다. 부모님께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쪽같은 세 자녀를 키워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재취업 과정도 순조롭다. 베트남으로 돌아온 직후, 그 역시 진로를 고민해야만 했다. 사업을 해야 할까, 취업을 해야 할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업을 선택한 귀환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고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사업하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 있었지만 다른 귀환자들을 보니 쉽지 않는 것 같아 포기하고 회사부터 먼저 다니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직장은 하노이 인근 박린성에 소재한 한국계 기업, 핸드폰 충전 케이블 제작 회사였다. 회사의 규모는 그가 한국에서 일했던 곳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직원이 무려 95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도 달라졌다. 한국에서 그는 단순 노동자였다. 베트남의 회사에서 그는 직원을 채용하고 관리하는 인사관리 담당자이다. 쉬운 일은 없어요. : 변화와 도전, 마다하지 않을 뿐이죠. 베트남의 한국 기업에서, 베트남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인사 및 노무 관리’ 담당자로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반흥 이전에 이 일을 담당했던 서너명의 직원은 “고된 노동과 통역의 부담”이라는 공통의 사유로 사직을 선택했을 정도이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이 편안한 언어로, 업무를 지시하고 관리하는 일은 언뜻 보면 매우 쉬워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다르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관리자와 베트남 직원들 사이의 상이한 입장과 견해를 중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측을 향해서는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는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중재는 결코 쉬울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정당한 일처리를 하고 있을 때조차, 일부 노동자들은 협박 문자를 보내오기도 한다. “회사 폐업이 결정된 후 구조조정을 할 때 직원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어요. 어제도 협박 문자를 받았거든요.” 그러나 그는 담담하다. 같은 민족 노동자들로부터 오해와 협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자신의 선택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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