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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3.0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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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を通じて一番の名君と言えば第4代の王、"世宗"を思い浮かべる人が多いでしょう。一万ウォン札の顔、世宗と言えばハングル、世界で唯一、誰がいつ創ったのかが分かっている文字です。世宗は漢字の学習が困難な一般民衆も読み書きできるようなることを願い、ハングルを創製し、それは民衆を思う世宗の愛民政策の代表格といわれますが、世宗の業績は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世宗時代に様々な科学技術が発明され、実際に使われました。その発明の先頭に立ったのは、科学者、蔣英實(ちゃん・よんしる)です。


記録に残る蔣英實の父親は元(明の前の中国王朝)から来た人物、そして母親は奴婢身分でした。当時は母親が奴婢ならばその子どもも奴婢とみなされたので、蔣英實も奴婢として育ちました。低い身分の蔣英實でしたが、幼いころから手先が器用で一度見たものはなんでも作り上げたといいます。この才能が朝鮮3代の王、太宗の目にとまり、その息子の世宗が彼を大抜擢します。まず当時の科学の最先端地、中国(当時は明)に蔣英實を派遣し天文機器の研究を命じます。帰国後の蔣英實を奴婢の身分から解放し、宮中の技術者として迎えました。王の庇護の元、蔣英實は水時計(自撃漏)を発明しました。また日時計(仰釜日晷)、天体観察器機(渾天儀)の製作にも成功します。

当時は明の天文学が朝鮮でも使われていました。しかし明の都、北京とソウルは952キロ離れていましたから、当然天文観測上の差がありました。そのため日食など、王の権威の象徴に誤差が生じるのみならず、様々な農業上の不都合も起こっていました。農業国家であった朝鮮において、天の動きから季節や時間を知ることは欠かせません。農業国家の安泰のためには正確な天文学の知識が必要です。これに応えたのが蔣英實でした。また時計などなかった当時は時間を正確に知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そのため蔣英實は太陽の動きをみて時を判断する日時計、そして日の出ない日や夜にも星の動きをみて判断できるよう、天体観察器を作成しました。王宮内に設置された水時計、日時計、天体観察器機が時を刻むと、太鼓を打って民に時間を知らせました。ソウルの真ん中、鐘路の普信閣の鐘をならし、四大門の開閉を行い城内の治安維持などに努めたのです。

ちなみに天体観察器の渾天儀は一万ウォン札の世宗の顔の裏側に印刷されています。その後ろ、背景には朝鮮初期の天体図と、望遠鏡の図が描かれており、一万ウォン札は朝鮮半島の天文学の歴史を表わし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
 
画期的な発明により人々の生活に大きな便宜をもたらし、世宗の名声をあげるに貢献した蔣英實ですが、やがて不運に見舞われます。世宗の乗る輿の製作に関わったところ、その輿が壊れてしまったのです。蔣英實が奴婢身分から官位にのぼり、活躍したことを快く思わない勢力による妨害であった可能性もあります。いずれにしてもたいへんな処罰を受け、その後の行方は分かっていません。 

このように蔣英實の晩年は不遇だったようですが、蔣英實を抜擢した世宗の人を見る目、そして身分に関わらず登用に踏み切った決断力は注目に値するも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また世宗は民のために独創的な政策を行った王として知られています。ハングル創製は言うまでもなく、他にも例えば出産した奴婢の夫婦に、妻だけではなく夫にも出産休暇を与え、妻がしっかりと休めるよう、夫婦で育児に関われるようにしました。現代にも通じる、"人のための政策"を進めるリーダーのもとで、優れた人材が育ち、また活躍したのです。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성군하면 4대 왕 ‘세종’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원 지폐의 얼굴 세종대왕 하면 한글, 세계에서 유일하게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글씨입니다. 세종은 한자 학습이 어려운 일반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책의 대표 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종의 업적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세종 시대에 여러 과학기술이 발명되어, 실제로 사용되었습니다. 발명의 선두에 선 이가 과학자 장영실이었습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 나라에서 온 인물이며 어머니는 노비 신분이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노비면 그의 자식도 노비로 간주돼 장영실도 노비로 성장하였습니다. 낮은 신분인 장영실이지만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아 한 번 본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이런 재능이 조선 3대 왕 태종의 눈에 띄어서 그의 아들 세종이 장영실을 이례적으로 발탁하였습니다. 우선 당시 과학 최선단지인 중국(당시에는 명)에 장영실을 파견, 천문기기 연구를 명하였습니다. 귀국 후 장영실을 노비 신분에서 해방해, 궁중 기술자로 맞이하였습니다. 왕의 비호를 받아 장영실은 물시계(자격루)를 발명하였습니다. 또한 해시계(앙부일구), 천문관찰기기(혼천의) 제작에도 성공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천문학이 조선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수도 북경과 서울은 952킬로나 떨어져 있어 당연히 천문 관측상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일식 등 왕의 권위 상징에 오차가 생길 뿐만 아니라 농업상에도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농업 국가인 조선에 있어서 하늘의 움직임에서 계절이나 시간을 아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농업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는 정확한 천문학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에 응한 것이 장영실이었습니다. 

시계가 없었던 당시에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영실은 태양의 움직임을 보고 시간을 판단하는 해시계, 그리고 해가 뜨지 않는 날이나 밤에도 별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천문관찰기를 작성하였습니다. 궁 안에 설치된 물시계, 해시계 천문관찰기기가 시간을 알리며 북을 쳐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렸습니다. 한양 도성 가운데 있는 종로 보신각의 종을 쳐 사대문의 개폐를 하고 성내 치안 등을 유지하였습니다. 

참고로 천문관찰기인 혼천의는 만원 지폐 세종 얼굴의 뒷면에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조선 초기 별자리 그림과 망원경 그림이 그려져 있어 만 원짜리는 한반도 천문학 역사를 보여줍니다. 

획기적인 발명으로 사람들 생활에 큰 편의를 가져다주며 세종의 명성 알리기에 크게 공이 있던 장영실이지만 곧 불운이 닥쳤습니다. 세종이 타는 가마 제작을 하였다가 가마가 부서졌습니다. 장영실이 노비 신분에서 관위에 올라 활약한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은 세력들이 나쁜 일을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장영실은 이 일로 엄한 처벌을 받아 그 후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이렇듯 장영실의 만년은 불우했지만, 장영실을 발탁한 세종대왕의 사람을 보는 눈, 그리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등용한 결단력은 주목할 만합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해 독창적인 정책을 펼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글 창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이외에도 예를 들면 출산한 노비 부부에게 아내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어 아내가 잘 쉴 수 있도록, 부부가 함께 육아에 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현대사회에도 통하는 ‘사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 지도자 아래에서 훌륭한 인재가 자랐으며 또한 활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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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오의 한일역사 이야기] 世宗と蔣英實ー名君と偉大な発明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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